2017년 6월 24일 토요일

[그라치아] 잘놀아요 섹스토이랑!

+그라치아 92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내가 했던 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뭐 그리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매일 자위를 한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 방송 이후로 나는 한동안 남초 사이트에서 아주 신나게 까였다. 독방에서 혼자 자위만 하다가 질이 왕창 늘어나버렸을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따라 나는 한없이 넓은 우주와 같은 ‘갤럭시 보지’를 가진 여자가 되어버렸다. 뜻밖에 멋진 별명을 얻게 된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우주를 품을 만큼 넓은 보지를 가진 여자라니,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럼 나의 매일 자위 라이프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난 파트너와 소위 죽여주는 섹스를 하고 난 다음에도 자위를 한다. 때로는 파트너 섹스 도중에 하기도 하며 때로는 나 혼자서 하기도 한다. 누군가 이렇게 묻더라. 매일 자위는 섹스토이가 있어서 가능한 거 아니냐고. 솔직히 맞는 말이다. 섹스토이는 그야말로 도구다. 나와의 섹스를 도와주기도 하고 파트너와의 섹스를 도와주기도 하는 도구 말이다. 요리할 때를 떠올려보자. 당근이나 무와 같은 채소를 정갈하게 채 썰기 위해서 칼 한 자루만 있어도 가능하지만, 채 칼이 있으면 더 빠르고 쉽게 채를 썰 수 있다. 채 칼과 마찬가지다. 오르가즘을 느끼고 싶지만 내 손의 한계를 느낄 때 섹스토이를 사용하면 더 빠르고 쉽게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 손을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인지라 바이브레이터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다. ‘나는 그래도 기계는 너무 싫다’며 고개를 흔드는 여성분들도 많이 보았다. 싫다는 분에게 굳이 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꼭 아셔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섹스토이의 세계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내가 처음 바이브레이터를 접했던 약 10년 전에는 솔직히 너무나 시끄러운 바이브레이터가 대부분이었다. 내 방에서 문을 꼭 닫고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사용하더라도 다른 방까지 진동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엔 켰는지 껐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바이브레이터들도 많이 나와 있다. 또 내 손보다 더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재질의 섹스토이들도 있다. 무조건 싫다고 하기보다는 한 번 쯤은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끔 섹스토이로 하는 자위가 너무 즐거워서 더 이상 파트너 섹스를 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특히 이성애자 여성들이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페니스 삽입이 곧 섹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고민일 것이다. 커다란 딜도나 이리저리 회전하는 딜도는 당연히 인간의 ‘페니스’와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위와 파트너 섹스 둘 중 하나를 꼭 골라야 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위가 정말 너무너무 즐겁다면 다 때려치우고 자위만 할 수도 있다. 섹스토이가 너무 좋다면 파트너 섹스에서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섹스토이는 마법지팡이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클리토리스 자극 위주의 자위를 하는 지 삽입 위주의 자위를 하는 지와 같은 기본적인 본인 취향은 스스로 파악한 다음 섹스토이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물론 자위를 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일단 섹스토이라도 사보자는 마음이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만, 그게 아니라면 무작정 구매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더 추천한다. 후기를 찾아보는 것도 좋지만 ‘유명한 토이’가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여성들과 ‘토이파티’를 진행하고 있다. 섹스토이의 종류와 사용법에 대해 알아보는 일종의 세미나다. ‘토이파티’를 진행하다보면 섹스토이의 종류만큼이나 여성들의 욕망이 다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섹스토이들이 있는 지 전혀 몰랐다는 여성들은 이것저것 만져보며 즐거워하곤 한다. 자신의 성기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들을 위해 다양한 보지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보지 인형을 이용해 섹스토이 사용법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같은 여성이라고 해도 다 알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섹스, 내가 원하는 자위는 나만이 알 수 있다. 내 몸을 내가 직접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분명 자신의 우주와 같은 욕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갤럭시 보지로 가는 열차에 탑승한 것을 환영한다. 

2017년 6월 22일 목요일

[경향신문] 내가 남자를 만나지 않는 이유

+경향신문에서 은하선의 섹스올로지를 연재합니다. 


나에게도 한때 멋진 커밍아웃을 꿈꿨던 시절이 있었다.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친동생이 우연히 내 사진이 실린 인터뷰 기사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접했고, 내가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부탁했으나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은 탓에 나는 갑자기 아우팅당해 버리고 말았다. 난 한동안 절망했다. 더 불쌍하게 보일 걸. 눈물이라도 흘릴 걸 그랬나. 차라리 닮은 사람이라고 잡아뗄 걸 그랬나.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몇년째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언니가 나의 파트너라는 사실을 내 입도 아닌 동생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엄마는 오열했다. 그리고 물었다. “너 원래 남자 좋아했잖아. 그럼 너는 남자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거야? 무슨 애가 그렇게 줏대가 없어. 너 안되겠다. 차라리 한쪽을 정해.”
만약 내가 레즈비언이었다면 엄마가 받아들이기 쉬웠을까. 그건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양성애자인 나는 왜 남성이 아닌 여성 파트너와 사는 것을 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 질문은 왜 멀쩡한 ‘이성애자’처럼 살 수도 있는데 굳이 어려운 ‘레즈비언’의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남성도 좋아하니까 차라리 남성을 만나서 ‘이성애자’처럼 살았다면 정말 내 인생이 지금보다 나았을까.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은 받을 수 있었겠다만, 글쎄 다른 건 잘 모르겠다. 여성과 섹스하기 위해서 돼지발정제를 구매하고, 콘돔을 싫어해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남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정말로 남자와의 삶이 그리도 권장할 만한 삶이란 말인가. 
‘추억은 방울방울’이 된 돼지발정제 
대선 유력 주자였던 홍준표가 오래전 자신의 자서전에 적었던 일은 아직도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돼지발정제로 강간 모의를 했던 일을 하늘에 한 점 부끄럼을 느끼지 않고 무려 책으로 남겼다는 점과 그 일이 터진 이후에도 홍준표를 향한 사랑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았다는 점은 아직도 놀랍다. 섹스해보겠다고 여성에게 돼지발정제를 먹였던 한 젊은 청년의 실수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감정이입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얼마나 섹스하고 싶었으면 그런 짓까지 했겠나. 나도 그런 적 있다. 그런 일 정도는 넘어가자. 본인이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 친구가 그랬다고 하는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가. 
남성 연대의 끈끈함, 강간까지도 연대하는 힘. 
결국 나는 혹시나 했던 사실을 확인해버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동의 없는 섹스는 강간’이라는 
기본적인 사회적 합의조차 안된 사회라는 사실을 말이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피해자 여성이 아닌 가해자 남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것은 남성 연대가 정말 그만큼 끈끈하기 때문인가. 
남성 연대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남성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만큼 
힘이 강력한가. 
왜 남성들은 남성 연대에 속하고 싶어 하는가.
난 이 ‘줄줄이 소시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이 사회의 남성들은 정말 여성과의 연애’를 바라고 있긴 한 것인가. 여성과의 ‘합의된 섹스’를 바라고 있긴 한 것인가. 그리고 얼마 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남자 마음 설명서>라는 책에 자세하고 친절하게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청와대 행정관으로 내정된 탁현민이 오래전에 쓴 책인데 얼마 전 화제가 되었다. 
부제목은 ‘남자가 대놓고 말하는’이다. 대놓고 말하겠다니 그럼 그 전엔 대놓고 말하지 못했었다는 말인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남성들이 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어떤 시절이 있었나 보다. 목차를 보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가관이지만 그중에서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린 건 ‘콘돔을 싫어하는 여자’ 부분이었다. 우리는 그 지점에서 책의 저자가 콘돔을 싫어한다는 사실과 콘돔 존재의 이유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자가 대놓고 말하는’ 콘돔이 싫어 
콘돔은 피임과 성병예방을 목적으로 쓰이는 물건이다. 여성들은 개인적인 좋고 싫음으로 콘돔 사용의 여부를 선택하기 어렵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으면 섹스 후 다음 생리가 시작되기 전까지 ‘임신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내가 올해로 남성과 섹스를 하지 않은 지 5년째인데 지금도 생리가 늦어지면 ‘설마 임신인가’ 생각을 하곤 한다. 임신 공포가 이 정도다. 임신할 일이 전혀 없음에도 임신을 두려워하게 만들 정도인데, 콘돔 없이 남성과의 삽입 섹스를 한 이후에 닥칠 임신 공포가 얼마나 크겠나. 결국 콘돔이 싫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는 선언은 임신 공포가 전혀 없는 남성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원치 않는 임신과 같은 일이 자신의 몸에 일어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저 싫다는 이유로 콘돔 사용을 거부하며 여성들에게 속삭일 수 있는 것이다. 콘돔을 싫어하는 여자가 매력 있다고.
이쯤에서 우리는 이 책의 제목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자 마음 설명서>. 탁현민의 마음 설명서가 아닌 ‘남자 마음’ 설명서이다. 이 책은 자신의 생각이 남성을 대표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쓰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 자부심은 살면서 만나왔던 남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굳어졌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믿음은 하루 이틀 사이에 굳어졌을 리가 없다. 끈끈한 남성 연대가 분명 이 책의 탄생에 거대한 힘을 실어줬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콘돔을 싫어한다는 말을 부끄럼 없이 내뱉고 한때 약물 강간을 모의했었다는 말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남성들이 끈끈한 연대를 이루고 있는 세상. 이 세상의 남성들은 여자와의 ‘합의된 섹스’를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여성과의 섹스 경험을 부풀려 떠벌리면서 남성 연대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뿐이다.
‘그럴 수도 있지’ 남자 연대의 끈끈함 
이런 세상에서 나는 여성 파트너와 사실혼 관계로 살지만 미혼 여성 취급을 받고, 왜 양성애자면서 남성이 아닌 여성과의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한다. 요즘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런 끈끈한 남성 연대 속에서 ‘멀쩡한’ 남자를 찾아낼 자신이 없다는 다소 ‘겸손한’ 대답을 하고 있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농담이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을 만나고 싶어 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에게 사랑받고 싶어 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는 남성들이 있다. 그런 남성들은 ‘쳐다보는 시선이 불쾌하다’는 뜻에서 나온 ‘시선 강간’이라는 단어를 듣고도 반성하기보다는 쳐다봐 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며 분노를 표출한다. 자신의 시선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여성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 자체를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남성들은 결국 어디로 갈까. 남성 연대에서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 욕을 먹곤 하는 이 시대의 남성들은 섹스해 주지 않는 여성에 대한 서러움과 분노에 몸부림치며, 결국 여성을 ‘따먹겠다’는 일념으로 큰돈을 지불하고 픽업 아티스트에게 여성을 유혹하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 그 길도 평탄치 않을 것이다. 
부디 하루빨리 정신 차리고 그 남성 연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같은 취급받지 않고 싶다면 말이다.

[경향신문]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도대체 그게 뭐람

+경향신문에서 '은하선의 섹스올로지'를 연재합니다. 

머리가 긴 남자를 법으로 금지했던 시절이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지만 놀랍게도 1970년대 이야기다. 장발의 기준은 ‘남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머리’였다. ‘여자처럼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머리가 길었던 남성들은 타인에게 불안감과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머리를 짧게 깎였다. 2017년 지금, 이제 더 이상 길거리 장발 단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 같은 건 없다. 원하면 남성도 허리까지 머리를 길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들은 ‘자유롭게’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 머리가 긴 남성은 머리가 짧은 여성보다도 찾아보기 힘들다. 
왜 대다수의 남성들은 여전히 아직도 ‘자발적’ 장발금지령 속에서 살고 있을까.
몇 년 전 머리가 짧았던 나는 클럽에서 한 남성과 키스를 하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바로 사과를 하더니 ‘남자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남성과 남성이 키스하는 줄 알고 때렸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남자와 키스하는 남자는 때려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게이’도 ‘남성’도 아니었지만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게이 남성에게 가해지는 혐오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성애자’처럼 보이지 않으면 주먹질을 당하고‘성소수자’처럼 보이면 오해라며 해명하는 사회
어떤 성별과 섹스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말하고 더 남성스럽고, 더 여성스럽기를 강요하는 세상
지난해 8월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회원 한 명이 종로에서 만취한 30대 남성에게 ‘호모새끼들아’라는 욕설과 함께 얼굴을 가격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2011년에는 종로 근처에서 게이 커플이 손을 잡고 걷다가 남성 세 명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외에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두려워 폭행을 당하고도 드러내지 못한 수많은 성소수자 혐오범죄의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호모’와 ‘게이’가 욕이 되는 사회에서 게이로 보이거나 게이일 수 있는 사람들, 게이인 사람들은 언제 자신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폭행의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얼마 전 네덜란드에서 한 게이 커플이 손잡고 길을 걷다가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네덜란드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다. 그런 나라에도 성소수자 혐오가 존재한다니 암담하지만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누구라도 ‘이성애자’처럼 보이지 않으면 맞을 수 있다는 슬픈 현실 속에서 많은 성소수자들은 ‘이성애자’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한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성소수자들만 ‘이성애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사회가 정해놓은 ‘여성’과 ‘남성’의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성정체성과 관계없이 성소수자로 ‘의심’받기 때문에, 지구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자신이 성소수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유튜브 채널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장법을 제안하며 뷰티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개그맨 출신 김기수씨는 ‘화장을 하는 남자’라는 이유로 트랜스젠더라고 ‘오해’받는 연예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게이나 트랜스젠더가 절대 아니라는 점을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방송을 통해 “사람들이 왜 내 아랫도리를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다”며 “규정짓지 말아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왜 그는 자신이 ‘이성애자 남성’임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할까. 그 어떤 연예인도 이성애자라고 ‘오해’받지 않는다. 이성애자로 ‘오해’받는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커밍아웃’하는 연예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절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연애 상대의 성별이 ‘여성’이라고 밝히면서까지 자신이 가진 ‘남성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성소수자라고 ‘오해’받는 연예인은 김기수씨뿐만이 아니다. 가수 조권씨는 데뷔 초창기부터 게이라고 ‘오해’받는 연예인이다. ‘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대중이 생각하는 ‘남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게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화장을 하거나 높은 목소리를 내거나 옷차림에 신경을 쓰거나 섬세한 손놀림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중이 선정한 ‘게이’가 될 수 있다. 연예인의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을 둘러싼 여러 가지 ‘루머’들을 보고 있으면 소위 말하는 ‘대중’들이 얼마나 성소수자에 대해 무지한지 알 수 있다. 성소수자 혐오가 존재하는 한, 본인이 성소수자이거나 혹은 본인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더라도 이성애자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예인의 성정체성을 가벼운 가십으로 소비하는 것은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기는 일이다.
나는 여성 파트너와 같이 살고 있는 바이섹슈얼, 즉 양성애자 여성이다. 사람들은 내 파트너의 성별에 따라 나를 레즈비언 혹은 이성애자로 본다. 내가 남자랑 사귀면 이성애자, 여자와 사귀면 레즈비언으로 본다. 여성을 만나던 내가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드디어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바이섹슈얼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성 파트너와 살고 있다고 말을 하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레즈비언이냐’고 물어보고 ‘이렇게 여성스러운 레즈비언은 처음 봤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머리가 짧고 바지를 입는 여성만 레즈비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치마 입고 화장하는 여자가 레즈비언일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반성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 사람 인생 최초의 레즈비언이자 ‘지나가는 레즈비언1’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다. 내가 아무리 ‘저 바이섹슈얼인데요’라고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을 ‘남성’ 혹은 ‘여성’, 둘 중 하나로 나누고 어떤 성별의 사람과 섹스하고 싶은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더더욱 남성스러워지기를 또는 더더욱 여성스러워지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체 남성스러운 것이 무엇이고 여성스러운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뜨개질을 좋아하며 긴 머리를 가진, 치마를 주로 입는 여성은 여성스러운 여성인가. 그렇다면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요리를 좋아하며 이종격투기를 즐겨보면서 취미가 뜨개질인 남성은 어떤가. 성소수자 혐오가 존재하는 세상,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길을 가다가 모르는 이에게 폭행을 당할 수 있는 세상에서 결코 우리 중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당신이 이성애자라고 해도 말이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다.

2017년 3월 2일 목요일

[경향신문] 당신에게 묻는다, 페미니스트의 정확한 뜻을 아는가

+경향신문에서 '은하선의 섹스올로지'를 연재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기지만, 한때 난 대학에 가면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사이좋게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해 욕을 하면서 여성인권을 토론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학교에는 그 흔한 페미니즘 모임 하나 없었다. 찾아본 정보로는 하나가 있긴 했는데 나의 입학과 동시에 해체됐다는 슬픈 소식뿐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그 절망적인 기분의 정점을 찍은 건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서 16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성의 이해’라는 인기 강의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였다. 그야말로 광적인 클릭의 ‘넘사벽’을 넘어야만 수강신청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전설의 강의. ‘성의 이해’는 말 그대로 섹스를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냐면 학교 앞에 그 강의 이름을 딴 칵테일을 파는 바까지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듣고 있던 강의 하나가 갑작스레 휴강되는 바람에 시간이 난 나는 동아리 선배를 따라 그 강의를 우연히 청강하게 되었다. 넓은 강의실이 학생들로 빼곡하게 가득 차 있었다. 수업의 실체를 알게 된 순간 놀라웠다. “에이즈는 (섹스를) 많이 해서 걸리는 병이에요.” 강사의 말에 학생들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난 소름이 끼쳤다. 나는 속에서 열불이 나는데 사람들은 배를 잡고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이성애자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전시하는 그 강의 안에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은 철저하게 없는 사람 취급되는 수준을 뛰어넘어 웃음 코드로 소비되고 있었다. 나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팩트’조차 어긋난 강의 내용이었다. 21세기에 질외사정을 피임법으로 가르치는 강의라니, 대체 뭘 더 기대할 수 있을까. 
몇 년 후, 나는 운명처럼 ‘성의 이해’ 반대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학내에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해서 희망을 갖고 여기저기 찾아가보기도 했다. 그 결과 양성평등센터에서는 “명백한 성희롱이라 볼 수 없어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고, 총여학생회에서는 “나도 그 수업을 들었는데 유익했다. 야해서 문제냐?”는 말을 들었다. 넓은 캠퍼스에 정말 페미니스트가 나 혼자란 말인가. 외로웠다. 나는 부지런히 그 수업 내용을 녹취해 온갖 언론사에 제보 e메일을 보냈고, 외부 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수업은 결국 폐강됐다. 시작은 혼자서 했지만 끝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졸업할 때쯤에는 학내에 작은 페미니즘 모임도 꾸릴 수 있었고, 페미니스트 총여학생회 선거본부가 부활하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그 수업이 ‘선정적’이어서, 즉 ‘야해서’ 폐강됐다고 생각한다. 섹스를 다룬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섹스를 ‘잘못’ 다뤄서 문제였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야해서 문제라는 거야? 페미니스트들 너무 보수적이네”라는 말이 돌아왔다. 어쩌다가 섹스 칼럼을 쓰게 됐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사실 ‘성의 이해’ 반대 운동 과정이 내가 섹스 칼럼을 쓰게 된 큰 이유 중 하나다. 페미니스트가 쓰는 섹스 칼럼을 보여주기 위해서 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는 섹스를 싫어한다는 놀라운 선입견을 가진 이들은 때로 나에게 대체 섹스 칼럼 쓰는 게 무슨 페미니즘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래서 난 섹스 칼럼을 쓰는 것이 왜 페미니즘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온갖 성적인 욕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말하는 여자는 저절로 ‘걸레’이자 ‘창녀’가 된다. ‘성희롱’을 하고선 ‘농담’이었다고 넘겨버리는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나와 같은 여성들이 조금이라도 덜 외롭기를 바라며 난 섹스에 대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페미니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페미니즘 강의가 끊이지 않고 불황이라는 출판계에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는 잘 ‘팔리는’ 분야가 됐다. 그리고 얼마 전 문재인 후보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통령 후보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다니, 페미니즘이 확실히 ‘유행’은 ‘유행’인가보다. 
문제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한 그 후보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운운하면서 사실상 낙태죄 폐지와 성소수자 결혼 합법화를 반대했다는 데 있다. 대체 페미니즘이 뭐라고 생각한 걸까.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한 가수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페미니스트가 뭔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실제 한 포털 사이트에서 페미니스트를 검색하면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나는 내가 왜 페미니스트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누구는 여자한테 친절하기만 해도 페미니스트가 된다니, 정말 부럽다. 실제로 인터넷상에는 그 후보가 아내와 다정히 함께 있는 사진과 함께 ‘이렇게 아내를 웃게 만드는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글이 돌아다니기도 하더라. 
난 요즘 노력하지 않고도 남자라는 이유로 쉽게 거머쥐는 남자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쉬운 예로 텔레비전을 켜면 온통 남자들만 나온다. 예능부터 시사·정치 프로그램까지 전부 남자들뿐이다. 남자들이 나와서 요리를 하고 남자들이 나와서 병원에 가고 남자들이 나와서 클럽에 가고 남자들이 나와서 밥을 먹고 남자들이 나와서 정치를 한다. 여자들은 어쩌다 한 명씩 끼워준다. 여자는 아무리 요리를 해도 ‘요리 연구가’가 되고, 남자는 요리만 해도 ‘셰프’ 소리를 듣는다. 남자란 이유만으로 전문가가 된다. 섹스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성의 이해’라는 수업은 사라졌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귀고 너무 빨리 섹스하지 말라”며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섹스를 가르친다.
16년 동안이나 성에 대해 강의하면서 피임법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던 강사와 페미니스트의 정의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대통령 후보. 그 둘은 너무 닮아 있다. 잘 모르면서 잘 아는 척을 해도 대충 넘어가며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잘 모르면서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을 했을 것이고 잘 모르면서 젠더 폭력을 운운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문재인 후보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이번엔 넘어갈 수 없다. 그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은 끝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외롭고 조마조마하다. 문재인 후보가 과연 그 외롭고 조마조마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까. 모두가 다 웃는 강의실 안에서 묵묵히 울음과 분노를 참아내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실망을 하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난 여기까지 왔다. 바이섹슈얼 여성으로 살면서 겪는 온갖 폭력 속에서 스스로를 키우면서 여기까지 왔다. 섹스 칼럼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섹스를 하자고 덤벼드는 남자들을 물리치며 여기까지 왔다. 절박한 사람들에게 “나중에”를 외치는 사람은 분명 절박함을 모른다. 나중에 차분하게 말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모른다. 페미니즘은 나의 세계관이자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다. 페미니즘을 팔아먹지 마라. 나의 페미니즘은 천박하지 않다. 

[경향신문] 자위도구가 청소년 유해물건이라고?

+경향신문에서 '은하선의 섹스올로지'를 연재합니다. 

지난주 한 콘돔 회사 대표가 돌출형 콘돔을 청소년에게 판매했다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콘돔은 현행법상 청소년에게 판매 및 제공할 수 있는 생활용품이다. 편의점에서도 나이 불문하고 누구나 콘돔을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돌출형 콘돔은 다르다.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분류된다. 그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왜 콘돔은 되고 돌출형 콘돔은 안되는가.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한 매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들이 섹스할 때 쾌락과 자극을 느끼면서 할 우려가 있어 해당 물품의 판매를 금지했다.” 물음표 100만개가 뜨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과 섹스라는 단어의 조합은 물고기와 자전거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청소년에게 피임법만 가르쳐도 섹스를 하라고 가르치는 거냐며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나는 나라에서 섹스를 하고 싶은 청소년의 욕망은 없는 것처럼 취급당한다. 민감하기에 꺼내고 싶지 않고 묻어두고 싶은 주제가 바로 청소년과 섹스다.
남자 청소년은 그나마 낫다. 20대 초반에 만났던 한 남성은 그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 동네 형들이 좋은 걸 알려주겠다며 자신을 불렀단다. 뭘 알려주려나 싶어서 기대했는데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자위 워크숍이었다고 했다. 순간 나는 남자인 그가 너무나 부러웠다. 수능 보기 전날에는 쓸데없이 자위해서 에너지 소모하지 말라는 조언도 듣고, 머리맡에 화장지를 놔주는 누군가의 친절함을 경험하며 자란 남자 청소년들의 삶은 여자 청소년들과 얼마나 다른가. 
예를 더 들어볼까. 야동을 보다가 갑작스러운 엄마의 들이닥침을 경험하는 남자 청소년은 약방의 감초와 같은 드라마 단골소재이지만, 야동을 보다가 갑작스러운 엄마의 들이닥침을 경험하는 여자 청소년은 상상 밖의 존재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도 ‘여자가 자위를 한다고?’ ‘그것도 청소년이?’ ‘자위하면 처녀막 파열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성욕이 약하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묻는 분들도 계실 거다. 성욕이 약한 여성과 성욕이 강한 남성, 세상에 딱 두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분들. 그런 분들을 설득하기에 나에게 허락된 하얀 종이가 너무 작으니 일단 넘어가자. 
여자 청소년의 섹스가 ‘삭제’된 사회에서 여자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경험을 말할 수 없어 괴로워하곤 한다. 나도 그랬다. 자위를 하고 파트너 섹스를 하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누군가가 알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며 나의 반짝이던 10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나는 그 시절을 절대 잊지 않고 있다. 여자 청소년들의 섹슈얼리티에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섹스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외로웠던 과거의 나를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 청소년들이 자유로운 공간에서 안전하게 섹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재작년 여름, 여자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섹스토이 파티를 기획했다. 섹스토이를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파티를 시작하려는 순간 경찰 7명이 들이닥쳤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경찰은 청소년들에게 섹스토이를 판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게 안을 훑어본 후 나에게 물었다. “남자는 없어요?” 여자들만 있고 섹스토이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경찰들은 돌아갔다. 남자가 없냐는 질문의 의도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혹시 난교를 상상했던 걸까. 
경찰의 방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신고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비슷한 일은 지난해에도 있었다. 나는 지난해부터 여성과 퀴어를 위한 섹스토이 숍을 운영하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숍은 작은 레스토랑 한구석에 숍인숍으로 입점해 있는데, 그 때문에 지난해 경찰 조사를 받았다. 청소년이 드나들 수 있는 레스토랑에 섹스토이를 전시하는 것은 청소년보호법을 위반한다는 이유에서다. 매장을 방문한 경찰은 누군가의 신고가 있었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청소년이 섹스토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두려운 현실이고, 바른 시민 의식을 불끈 솟아오르게 만들어 굳이 신고까지 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많은 청소년들이 나에게 문의 전화를 하곤 한다. 청소년은 섹스토이를 살 수 없나요? 왜 살 수 없나요? 나는 그럴 때마다 앵무새처럼 청소년은 콘돔, 젤만 구매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현행 청소년보호법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헌법소원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섹스토이가 왜 청소년 유해물건인지는 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들을 위한 섹스토이는 대부분 바이브레이터 혹은 딜도다. 즉 진동으로 자극을 주는 것과 삽입할 수 있는 것. 물론 두 가지 기능이 합쳐진 것도 있다. 두 제품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청소년보호법상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실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바이브레이터는 사실상 마사지기다. 진동 기능이 있는 미니 마사지기는 팬시용품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이브레이터는 민감한 부위인 성기에 닿았을 때를 고려해 부드러운 실리콘 소재를 이용해 만들거나, 좀 더 행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저소음으로 만드는 것뿐이다. 
‘딜도’라고 하면 남성 성기 모양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지만, 최근에는 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이 반영된 디자인의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 독일의 한 회사는 야채 모양의 딜도를 만들기도 한다. 딜도를 대체할 만한 물건을 찾는 일도 어렵지 않다. 특히 마트 문구 코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지, 당근과 같은 스틱 모양의 야채 모형, 올록볼록한 손에 잡기 좋은 미니 볼링 핀,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요술 봉까지…. 대체 무엇이 청소년 유해물건일까. 청소년 유해물건은 누가 결정하는 걸까. 바이브레이터와 딜도가 청소년 유해물건이라면 세상에 청소년 유해물건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한국의 섹스토이 판매 사이트들은 대부분 성인 인증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독일, 일본을 비롯한 해외 국가들의 섹스토이 판매 사이트들은 성인 인증 없이 구경할 수 있다. 18세 이상만 볼 수 있다는 문구에 ‘예’ ‘아니요’만 체크하면 들어갈 수 있거나 이마저도 해놓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이 행여 성적 쾌락을 느낄까봐 돌출형 콘돔을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지정하고 바이브레이터와 딜도를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지정하는 사회, 그리고 행여 청소년이 섹스토이의 존재를 알게 될까봐 두려워 나를 신고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미안하지만 내 인생 최초의 섹스토이는 냉장고 안에 잠자고 있던 오이였으며 잡지 부록으로 받은 진동 칫솔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