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5일 월요일

[젤리와 만년필] 누구세요 나나는

+고양이 문예지 젤리와 만년필 2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1.

나나가 다리를 다쳤는지 며칠 째 절뚝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나는 내가 밥을 챙겨 주고 있는 고양이다. 주로 저녁 무렵에 집 근처에 나타난다. 길고양이를 잡아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 잡아야 되지? 일단 참치 캔이라도 준 다음에 뒤에서 수건으로 갑자기 습격하면 될까? 아니다. 그럼 너무 놀라겠지. 당연히 도망치겠지. 동물농장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덫 같은 것으로 잡기도 하던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 덫은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일 년이 넘도록 밥을 챙겨 주고 있지만 나나를 만져본 적은 없다. 아무리 길고양이라지만 서운한 건 사실이다. 밥까지 챙겨 주는데 한 번쯤은 만질 수 있도록 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길고양이는 사람과 가까워져봤자 괜히 안 좋은 일만 겪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서운하지 않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구상에서 숨 쉬고 있는 나 이외의 생명체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가까워져봤자 이별할 때 남은 질척거리는 감정을 처리하기 더 힘들 뿐이다. 만나면 이별하기 마련이다. 어떤 관계라도 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길고양이라니. 다른 동네에 가버리면 그만이다. 관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어떠한 관계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다. 관계가 변하는 일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신의 영역에 가깝다. 인간관계를 자신의 노력으로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 틀어진 관계는 원상 복구할 수 없다. 아무리 보고 싶다고 발버둥 쳐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법이다.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걸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물론 난 법적으로 성인이다. 술도 마실 수 있고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을 만큼 돈도 벌고 있고 원한다면 고양이를 집에 들일 수도 있다. 그래. 고양이. 엄마는 고양이를 참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어릴 적 엄마는 일본식 주택에 살았는데 쥐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의 엄마는 고양이를 몇 마리 집에 들였다고 한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한 마리 생겼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견이다. 지금도 건강하다. 이제 몇 년 만 더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난 견이를 통해서 관계에 대해서 배웠다. 난 견이를 좋아했지만 견이는 날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지금도 엄마 집에 가면 견이는 나에게 하악질을 해댄다.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한다는 바로 고양이의 그 하악질 말이다. 견이는 하악질을 할 때 온 몸의 털을 세우고 입을 커다랗게 벌린다. 아마 그건 견이가 나에게 하는 욕이겠지. 견이를 좋아하지만 굳이 견이가 이제 와서 나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운하지 않다. 괜찮다. 서운하다는 감정은 귀찮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면 서운하지 않다. 가까워지지 않으면 기대를 할 일이 없고 기대를 하지 않으면 서운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결국은 관계의 문제다.그렇다고 내가 사람이나 고양이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고 착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난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게 싫을 뿐이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너무나 쉽고 뻔뻔하게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지겹다. 난 내가 제일 좋다. 혼자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 그럼 나나의 밥은 왜 챙겨줬느냐고? 나나는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길고양이는 집시와도 같은 존재다. 나는 나나가 내가 주는 밥을 먹을 때 외에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나는 내가 무엇을 먹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관계다. 난 이런 관계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관계가 좋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귀찮다. 그렇지만 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난 괜찮을까.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생각하지는 말자. 미래를 예측하고 두려워하면 인생이 괴로워진다.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나나의 다친 다리를 어떻게 치료해 주어야 하지?

2.

나나를 데리고 동물 병원에 갔다. 나나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덫을 빌리는 과정도 순조로웠다. 덫 안에 참치 캔을 세 덩이로 나눠서 넣어 놨더니 나나가 알아서 덫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이었다. 병원에 가서 보니 나나의 다리에 나일론 실 같은 것이 감겨 있었다. 실을 제거했으나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탓에 뼈가 살짝 녹았다고 했다.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자유로운 영혼인 나나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며칠 병원에서 쉬면 몸도 좋아지지 않을까. 며칠만 늦게 왔어도 다리를 잘라 내야 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괜히 미안했다.물론 내가 나나를 꼭 고쳐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의리 같은 건데 모르겠다. 의리는 친한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나나와 나는 하루 중 몇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만을 공유하는 사이다. 그걸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나는 나와 친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을까. 나는 그저 밥을 주는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실 친한 사이 그러니까 친구가 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 언제나 나에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친구가 없었다. 친구가 없다면 친구랑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엄마는 매일 아침 학교 가는 나에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했다. 친하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인지는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면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실을 같이 가는 사이라면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두 상황을 합쳐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 화장실에서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면? 미안하다. 대답을 원하고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솔직히 말하면 난 사람이 불편하다. 친하게 지내자면서 갑자기 다가오는 사람들은 정말 무섭다. 나는 내가 좋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매력적인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글쎄 조금 다르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나에게 먼저 친해지자고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다가온다는 것은 정말 이상하고 수상한 일 아닌가. 보험 아니면 다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다단계에 탕진할 수는 없다. 사람보다는 돈이 좋다. 이제까지 친구 없이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친구가 생긴다고 뭐 좋을 일이 있겠나. 게다가 돈이 있어야 나나에게 맛있는 참치와 츄르를 먹일 수 있다. 영화도 볼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고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사람과의 관계에 인생을 맡기면 내 인생을 내가 예측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나를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봤자 뒷담화의 주인공이 될 뿐이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의 씹기 좋은 오징어가 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나만 모르면 된다. 그게 편하다. 먹고살기 위해서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온갖 아부를 떠는 삶은 끔찍하다.난 지금이 좋다. 더 큰 돈을 벌고 싶지도 않고 친구나 애인이 필요하지도 않다. 처음부터 친구가 없었던 나 같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모두가 날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난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이렇게 길게 내 이야기를 한 건 정말 처음이다. 어차피 당신은 한국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니까 내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안심이다. 그렇다면 우린 친구일까 친구가 아닐까. 나의 속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한 적은 처음이지만 당신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나나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나의 언어와 나의 언어는 다르니까. 그렇다면 언어가 중요한 걸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3.

나나가 퇴원하는 날이다. 일이 바빠서 한 번도 병원에 문병을 가보지 못했다. 미안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내 얼굴을 보면 반갑기보다 나를 더 미워하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면서 미안해봤자 소용이 없다. 나나를 처음 잡았던 덫에 나나를 넣어서 택시를 타고 동네로 왔다. 나나의 발은 다 나았다고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밥도 잘 먹었다고 했다. 택시 트렁크에 덫을 실으면서 많이 걱정했는데 나나는 얌전했다. 그래도 많이 놀랐을 거다. 병원에서 오는 길에 콩나물국밥 집을 봤다. 뜨끈한 콩나물국밥 한 그릇이 먹고 싶어졌다. 나나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지만 안 되겠지. 병원에서 치료 좀 받게 해준 것뿐인 주제에 나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병원에서 퇴원했으니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서 주고 싶다. 고양이는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국물을 먹으면 속이 사르르 풀리지 않을까. 따뜻한 물에 향기로운 비누를 풀어서 목욕도 시키고 싶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다.나나는 지금 어서 빨리 예전처럼 동네를 자유롭게 누비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걸 바라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냥 나나를 동네에 풀어 주지 않고 이대로 내 방으로 데리고 간다면 어떻게 될까. 의외로 나나가 그걸 원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고양이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별 상상을 다한다. 내가 나나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책임을 진다는 건방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나나와의 관계는 예전처럼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대로 나나를 놔줬는데 나나가 다시 오지 않으면 어쩌지. 나에게 배신감 느껴서 다시는 내가 주는 밥을 먹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럼 너무 서운할 텐데. 서운하다는 감정은 역시 귀찮은데. 전화도 할 수 없는 길고양이에게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큰일이다.온갖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나나를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나나를 풀어 주는 게 좋겠다. 나는 나나의 삶을 알지 못한다. 나나는 길고양이고 나는 사람이다.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방식 자체가 다르다. 같은 사람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내가 길고양이와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나나가 다시 밥을 먹으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 난 그래도 나나를 병원에 데려갔으니까. 나나의 다리를 낫게 해줬으니까. 덫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하나 둘 셋 하고 문을 열면 나나가 뛰어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저기 멀리서 다리를 다친 고양이가 절뚝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누구지? 나는 눈을 찡그리면서 그 고양이를 쳐다봤다. 나나? 나나다. 그럴 리가? 나나는 덫 안에 있는데. 나나일 리가 없다. 나나는 이미 다리 치료를 받고 오늘 퇴원했다. 그런데 저 고양이는 나나다. 나나와 똑같은 색깔의 털과 무늬를 가지고 있다. 몸 크기도 비슷하다.“넌 누구니?”물어봤지만 고양이가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말은 정확하게 하자. 대답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아듣는 언어로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나나가 둘이었나. 그렇다면 누가 나나고 누가 나나가 아닌가. 동물병원에서 오늘 퇴원한 고양이는 나나가 아닌가. 둘 중 누가 나와 소통하던 고양이인가. 아니 소통을 하긴 했나. 소통이란 무엇인가. 진짜 소통을 했다면 왜 난 다른 고양이 두 마리를 구별하지 못하는가. 나는 누구를 나나라고 불렀는가. 애당초 구분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나. 구분을 했다면 대체 뭐가 달라졌을까. 구분이 의미가 있긴 했나.난 나나가 들어 있는 덫을 들고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어쩌면 나나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는 나나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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