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일 목요일

[여성신문] 섹스를 말하는 여자들을 위하여

 +2020년 여성신문 SXF 연재에 실었던 글입니다. 


사실 암컷이 더 밝히지, 숫컷보다

5년 전 책 <이기적 섹스>를 내고 한 언론사와 했던 인터뷰 기사가 떴을 때 그 밑에 달린 댓글이다. 여자가 섹스를 말하니까 당황한 나머지 이런 댓글을 달게 된 걸까? 기사에는 내가 어쩌다가 섹스를 말하는 책을 내게 됐는지 적혀 있었다. 자신의 섹스 경험을 과장해서 떠벌리고, 고수인 양 가르치려고 드는 남성들. 그리고 그런 남성들에게 끌려다니듯 섹스를 하게 되는 여성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안전하지 못한 상황들. 그럼에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사회.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을 책으로 담고 싶었다는 내용이 세밀하게 인터뷰 안에 녹아 있었다. 물론 넘쳐나는 기사 홍수의 시대에서 기사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는 사람은 없다. 댓글을 단 사람도 그랬을 거다. 그러나 열심히 말을 하는데 한참을 듣지도 않고 멍 때리다가 ‘어, 여자도 섹스하네’ 수준의 반응을 하는 사람은, 역시 별로다.

섹스에 대한 글을 쓴다고 말했을 때 반응도 대부분 이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섹스를 쓰는지보다 ‘섹스’를 쓴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한다. 놀랄 일은 아니다. 섹스의 영역뿐만 그런 건 아니니까. 여성의 말하기는 사적인 영역 취급당해왔고, ‘개인적’인 기분의 표현 정도로 폄하되기 일쑤다. 페미니즘도 섹스도 성폭력도 전부 여성들이 대충 자기 기분을 끄적여놓은 언제 버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구겨진 쪽지 정도로 바라본다. 대통령이 수감 중인 성폭력 가해자에게 힘내라며 꽃을 보내는 세상이다.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너도 좋았잖아’, ‘즐겨놓고 이제 와서 왜 그래’ 라는 어처구니없는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는데 좋다는 말은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못 한다. 호불호를 말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한 개인의 성장은 쉽게 묻히고 만다. 할 수 있어, 여자도 할 수 있다, 파이팅, 유 캔 두 잇 이런 문장은 허무하다.

섹스는 사적인 건데 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글로 남기려고 할까. 여자 몇 명이 모여 교환 일기장이나 돌리면 되지 왜 지면을 통해 글을 쓰려고 할까. 내가 미투 2018분 동안의 이어말하기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고 말했을 때, 수많은 이들은 ‘섹스를 좋아한다더니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며 나를 비난했다. 섹스의 즐거움을 말하며 섹스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던 한 여성이, 알고 보니 성폭력 피해 생존자였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섹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 모든 종류의 섹스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사람들. 분명 그들은 짜장면을 좋아할 것이고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침실에 들어가서 입을 벌리고 너 짜장면 좋아하잖아 라며 짜장면을 입에 처넣어도 짜장면을 여전히 좋아할 것이다. 좋아한다는 짧은 문장 안에 포함돼있는 여러 맥락을 삭제하고, 어떤 상황과 순간 속에서도 좋아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에게 사회는 모 아니면 도다.

나는 끊임 없이 모와 도 사이를 넘나들고 싶다. 섹스와 강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해자의 섹스 욕망을 부풀리고 피해자의 인생에서 즐거움을 삭제하는 사람들, ‘어떤’ 섹스가 아니라 ‘섹스’ 자체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면 결국 혼란 속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여자들이 섹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결국 여성들이 섹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말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넘나드는 우리의 글이 당신을 흔들 수 있길.

은하선 섹스 칼럼니스트·은하선토이즈 대표


2019년 7월 22일 월요일

[오마이뉴스] '섹스 얼마나 해봤냐'는 질문, 왜 들어야 하죠?


야망 있는 여자들을 위한 비밀사교클럽, 일명 '야비클럽' 시리즈가 세 번째 인터뷰에 접어들었다. 야망 있는 여자들을 위한 오프라인 모임도 준비 중이다. 40대에 접어들어도 투명인간이 되지 않는 법이 궁금해 시작했던 인터뷰 연재이지만, 회차를 거듭해갈수록 다른 질문도 늘어난다.

앞서 울프소셜클럽의 김진아 대표가 주장한 '여성연대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여성의 권익을 높이는 방법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이 돼야 하는지는 확신이 없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백 년을 풍미했던 '으쌰으쌰' 문화가 과연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것일까?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야비클럽 세 번째 인터뷰이에게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세 번째 주인공의 이름은 은하선. 책 <이기적 섹스>의 저자, 앨범 <나도 모르는 나>를 발매한 싱어송라이터, EBS <까칠남녀>에 출연한 섹스칼럼니스트, 섹스토이 숍 '은하선토이즈' 대표, 비건을 위한 술집 '드렁큰비건' 공동 대표, 유튜브 퀴어방송국 '큐플래닛' 운영자, 퀴어 오케스트라 무지개음악대 단원. 은하선 대표의 활동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성소수자로 살며 다양한 성 담론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지난 20일 홍대의 한 카페에서 솔직하면서도 소신 있는 그를 만났다.

"시사평론가에게 '정치 해봤냐'고 안 묻잖아요"

 페미니스트 작가 은하선
▲  페미니스트 작가 은하선
ⓒ 권우성

-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 작가이자 가수, 연예인이자 운동가, 유튜브 방송 운영자,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거로 알고 있는데.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이다. 2015년 책 <이기적 섹스>를 썼고 EBS <까칠남녀>에 패널로 출연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드렁큰비건과 은하선토이즈를 운영하고 있다."

- 대표 직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까?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일은 드렁큰비건과 은하선토이즈 운영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방송을 하는 일이 부수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누군가 제게 '너는 하는 일이 많은데 그 중 뭐가 가장 재밌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다 재밌다. 어떤 것도 사이드잡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 그렇다면 섹스 칼럼니스트로 자신을 먼저 소개한 이유는?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소개하면 방송에서는 '섹스' 자를 자르고 칼럼니스트만 내보낸다.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놀라는 걸 보는 게 재밌다.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네? 뭘 하신다고요?' 되묻는다. 시사 칼럼니스트나 시사평론가라고 했을 때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시사평론가들에게는 '정치 해본 적 있냐'고 묻지 않으면서, 섹스 칼럼니스트는 '섹스를 얼마나 해봤냐'는 질문을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증명을 해야 하는 건가. 가끔 이런 댓글도 달린다. '섹스 칼럼니스트인데 어떻게 양성애자야?', '섹스 칼럼니스트면 그만큼 많이 했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미아리에 있는 여자들이 섹스 칼럼니스트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섹스를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 섹스는 뭘까? 정상적인 섹스는 뭘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한다."

- 어쩌다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됐나?
"이렇게 많은 일을 하자고 계획한 건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섹스토이숍은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은하선토이즈은 원래 '걸스타운'이라는 퀴어와 여성을 위한 공간에 작게 붙어서 시작했다. 화장실로 가는 통로 옆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드렁큰비건 운영도 마찬가지다. 파트너가 요리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게를 운영하고 사업을 할 만한 가능성을 열게 됐다. 이렇게 빨리 책을 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2016년에 <SBS 스페셜>에 나왔던 것을 계기로 방송국에서 러브콜이 종종 왔고, 2017년 EBS <까칠남녀>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게 됐다. 글도 쓰고 방송 일도 하고 작은 사업도 하는 사람이지만 계획했던 건 하나도 없다."

- 뭔가를 계획하지 않고 사는 삶이 불안하진 않은가?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계획이 없었다고 말하신다(웃음). 가끔 학교 다닐 때 일화를 이야기해 주신다. 내가 언제나 지각을 해서 교통지도를 하시는 녹색어머니회 어머님들이 내가 오는 걸 신호 삼아 일을 마무리하셨다고 한다. 내가 들어가면 나머지 학생들은 다 들어갔다는 뜻이니까. 어머니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으셨단다."

- 그럼 천성이 그렇다는 걸까?
"계획한 것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서, 계획한 걸 멈췄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예중, 예고, 음대를 나왔다. 오보에를 계속했다. 음악을 계속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악은 안 하고 작가나 사업가로 살고 있지 않나.

음악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에 반해, 방송과 글쓰기는 예상치 않게 반응이 좋았다. 내가 계획하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어떤 일을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남들이 내가 열심히 하는 걸 알아주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

대신 생각지도 못 하는 일들이 커졌다. 책을 낸다거나, 파트너가 가게를 하게 되어서 같이 사업을 하게 되는 일들, 방송을 하는 일이 그렇다. 그래서 계획하기를 멈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한다"

 페미니스트 작가 은하선
▲  페미니스트 작가 은하선
ⓒ 권우성

심보선 시인은 최근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에서 예측과 예감의 차이를 이야기한 바 있다.

"예측과 예감은 미래를 상상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다. 예측은 연속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방식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미래, 통제는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준비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예감은 연속성과 정체성이 깨지는 방식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자의 출현으로부터, 내가 '무엇'이라고 임의적으로 명명하지만 사실 '무엇'이 아닌 어떤 존재의 출현으로부터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심보선 시인의 말대로 예감이 삶을 변화시키는 수수께끼 같은 힘을 감지하는 것이라면, 은하선 대표는 예측하기보다는 예감하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어떤 일들이 그를 '예측'이 아닌 '예감'의 인생으로 끌어 당겼을지 궁금했다.

- 왜 오보에의 길을 그만뒀나?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글 쓰는 일, 방송하는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스트레스였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할 때면 잘한다, 재능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노력한 것보다 성과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커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놓고 싶었지만, 오보에를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독일로 유학을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공부하면서도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오보에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들었다. 계속되는 오디션이나 연주가 지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나를 성추행한 일이 있어서, 한국에서 음악을 하기에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음악은 인맥이 중요하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오보에는 고급 취미가 됐다. 지난해부터 퀴어 오케스트라 무지개 음악대를 만들어서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 등에서 연주했다."

-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일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원래 '야망'을 물으려고 했었다. 
"사실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야망'이라는 단어 때문에 멈칫했다. '여자들의 야망'이라는 단어가 너무 신자유주의적인 서사이지 않은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사다. 난 이런 야망이 있었고, 사람들을 이렇게 바꾸고 싶었고, 세상을 이렇게 좋게 만들고 싶었다는 식의. 그런 서사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넌 뭐가 제일 좋아?', '궁극적으로는 뭘 하고 싶어?', '목표가 뭐야?' 그렇게 묻는다. 나는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 꿈도 크지 않다.

한 번은 누군가 인터뷰에서 '드렁큰비건을 어떻게 키우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와 파트너는 '키울 생각 없다'고 답했다. 왜 굳이 뭔가를 키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 성향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작게 시작하는 게 좋다. 조금씩 키워나가는 게 좋다."

'야망'이 누군가에게는 '노오력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착취의 프레임으로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큰 사람이 되어 사회에 기여한다'는 식의 스토리는 찬양 받지 못한다. 작더라도 내 개인의 것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때가 아닌가.

(* 은하선 인터뷰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기적 섹스 -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


은하선 (지은이), 동녘(2015)

2019년 7월 17일 수요일

[페이퍼] 여름은 뜨겁고 감기와 고양이는

+PAPER 2018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1. 

어제도 혼났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혼나고 나면 내가 정말 잘못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잘못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나.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기분이 나쁘다. 난 왜 그 상황에서 죄송하다고 해버린 걸까. 내가 만만해 보여서 그런 걸까. 아니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한테 왜 그런 거지. 머리 스타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란 머리는 아무래도 그렇다. 머리가 노랗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내 직업을 맞추려고 한다. 

“디자이너 맞죠? 아, 아니다. 그럼 사진 찍으세요?” 

여기서 그만두면 참 좋으련만 맞출 때까지 멈추질 않는다.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도 별로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면서 왜 관심이 있는 척을 하는 걸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꼭 한마디 씩 한다. 콧물감기가 생각보다 오래간다. 아, 콧물감기가 아니라 코감기. 어제도 이것 때문에 혼났다. 약국에 약을 사러 갔다가 일어난 일이다. 

“콧물감기약 주세요.” 

아니, 콧물이 흐르는 감기니까 콧물감기 아닌가. 그런데 약국 아주머니가 “콧물감기가 어디 있어. 코감기지. 코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코감기를 콧물감기라고 했다는 이유로 화를 낼 건 뭔가. 콧물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계속 흐른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대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계절도 콧물도 마음도 고양이도 어떤 것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더워질 줄은 몰랐다. 29도라니. 이건 너무 하지 않나. 덥다. 너무 덥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난 오뉴월 콧물감기 아니, 코감기에 걸려서 이렇게 훌쩍거리고 있다. 날씨는 덥고 콧물은 흐르고 나나는 보이질 않는다. 나나는 내가 밥을 챙겨주고 있는 고양이다. 다리를 다쳤는지 절뚝거리기에 걱정하고 있었는데 며칠 째 밥을 먹으러 오질 않는다. 

1년 넘게 밥을 챙겨주고 있지만 나나는 나와의 거리를 지킨다. 부드럽고 하얀 나나의 털을 만져보고 싶어서 몇 번 나나에게 손을 뻗어봤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정신없이 밥을 먹다가도 내 손이 가까이 가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멀리 도망쳐버린다. 내가 물론 나나의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 나나의 마음을 열 수는 없다. 겨우 밥이나 챙겨주면서 생색을 내면 안 되는 법이다. 사람도 고양이도 돈으로 마음을 열 수는 없다. 나나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방법에 대한 책은 있어도 길고양이의 마음을 여는 방법에 대한 책은 없으니까. 무수히 많은 연애 서적이 있어도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연애 서적 같은 건 없는 것과 비슷하다. 이 세상에는 책에 나오지 않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다. 나나는 보이질 않았고 난 마음에 초조해졌다. 사라진 사람도 찾기 힘든데 갑자기 사라진 길고양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가깝다고 느낀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난 나나가 밥을 먹으러 올 때 말고는 무엇을 하고 어딜 가는 지 아는 게 없었다. 어디 갔을까. 어딜 갔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에어컨이 고장이 나버렸다. 왜 갑자기 에어컨이 고장이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수리기사를 불렀지만 갑자기 더워진 탓에 일이 밀려 오늘 당장 오기 어렵다고 했다. 약 기운 때문인지 계속 눈이 감겼다. 덥고 졸리니 정신이 없었다. 나나는 주로 낮 시간에 밥을 먹으러 왔다. 혹시 모르니 집 앞에 밥을 들고 나가봐야 하지만 눈이 자꾸만 감겼다. 만약에 나나가 왔는데 내가 없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아니지. 나나는 다른 곳에서 밥을 먹고 다닐 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며칠씩이나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아니다. 정말 아파서 며칠 동안 끙끙 거리느라 못 왔을 지도 모른다. 나가봐야한다. 해가 뜨거웠지만 바람이 살짝 불어서 오히려 집보다 밖이 더 시원했다.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초록색 나뭇잎이 빛 때문에 반짝거렸다. 저런 곳에 매달려있는 기분은 어떨까. 가벼운 나뭇잎의 삶 같은 건 나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어떤 고양이들은 높은 나무에도 휙휙 오르곤 하던데 혹시 나나가 나무 위에 올라가있는 건 아닐까. 난 고개를 들어 주위에 있는 나무를 살펴봤다. 그러나 역시 그럴 리가 없었고 오늘도 나나는 오지 않았다. 난 집에 다시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시원한 맥주를 한 캔 꺼내서 마셨다. 감기약을 먹는 동안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나를 혼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을 거다. 
콧물감기나 코감기나 그게 그거지. 대체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혼을 내고 그러나. 복수의 의미로 난 맥주를 마실 것이다.

2. 

복수는 실패했다. 감기는 더 심해졌다. 코는 사이좋게 한쪽씩 번갈아가면서 막혔다. 코가 막히니 머리도 아팠다. 아무래도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으니 순환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셔야 할까. 물수건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코 위에 올려봤다.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의사 선생님한테도 혼나면 어쩌지. 왜 이제 왔냐고 혼이라도 나면 난 어쩌지. 혼나는 일 만은 피하고 싶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혼날 일도 없다. 6개월 전에 헤어진 A도 나에게 화를 자주 냈다. 마지막으로 A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혼이 나면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사과를 했을 뿐이었는데 그게 싫었나보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도 미안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자동적이었을 뿐이다. 정말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그런 건 아니었다. A는 한숨을 쉬더니 나를 두고 가버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은둔형 외톨이 같은 건 아니다. 그냥 난 혼자가 편할 뿐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정말 피곤하다.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양이를 기다리는 일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집을 나갔을 경우엔 고양이 탐정에게 찾아달라고 의뢰를 하기도 하던데 길고양이를 찾아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모르니 검색이라도 해볼까. 뭐라고 검색을 해야 되지. 상수동 고양이? 아닌데 상수동 길고양이? 이것도 아니다. 상수동 길고양이 다리 부상? 정말 모르겠다. 검색이 가능하긴 한가. 모르는 일 아닌가. 혹시라도 누군가 다리 다친 나나를 구조해서 병원에 데려갔을 수도 있지 않나. A가 싫어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상상 좀 그만하라고 혼을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A가 없으니까 괜찮겠지. 포털사이트보다는 어쩌면 인스타그램 같은 데에서 검색을 해보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A는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했다.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올렸다. 어디에 가서 어떤 걸 먹었는지 매일매일 올렸다. A가 셀카를 올리면 친구들은 하트를 눌렀다. A는 나랑 같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싶어 했으나 난 언제나 싫다고 했다. A의 친구들은 커플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자주 올리곤 했다. A는 친구들처럼 나랑 찍은 사진을 올리고 싶어 했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A는 뭐 어떠냐면서 나한테 답답하다고 말했다. A는 커플링을 맞추자고 했지만 난 그것도 싫다고 했다.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대체 왜 그러냐는 A에게 난 언제나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그 때 사진을 올려도 된다고 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어차피 지난 일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상수동 고양이를 검색하자 총 209개의 사진이 나왔다. 난 밑으로 내려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혹시라도 나나의 사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 이거 나나 아닌가? 나나처럼 하얀 털에 커다란 점박이 무늬가 있는 고양이 사진이다. 사진을 클릭해보자 정말 나나였다. 세상에 나나를 찾다니. 사진 속 나나는 상수동 길 위가 아닌 철장 안에 있었다. 메시지라도 보내봐야겠다. 정말 이 사람이 나나를 구조해서 병원에 데려간 사람일까. 어쩌면 나나와 비슷한 고양이 아닐까. 길고양이들은 쉽게 다치는 법이니까. 다리가 다친 나나를 닮은 고양이일 지도 모른다. 메시지를 일단 보내보자.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모르겠다. 보내면 답이 오거나 안 오거나 둘 중 하나겠지. A는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자주 받곤 했다. 대부분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만나자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A는 이게 다 커플 사진을 올리지 않아서라고 했지만 난 그래도 내 얼굴이 A의 인스타그램에 올라가는 건 싫었다. 좁은 세상인데 무슨 일이 있을 지 알 수 없으니까. A의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 나가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답답했을 거다. 나도 이런 내가 답답하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까. 막혔던 왼쪽 코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순간 메시지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정말 신기한 일이네요. 이 고양이는 제가 몇 달 전부터 집 근처에서 밥을 줬던 아인데 얼마 전에 다리를 다쳤더라고요. 아는 분에게 덫을 빌려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지금 입원 중이예요.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병원에 같이 가실래요?”
내일? 내일 별다른 일이 없긴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인데 괜찮을까. 그래도 나나를 치료해주신 분인데 괜찮은 사람 아닐까. 그걸 떠나서 나나를 만나고 싶었다. 나나가 맞을까. 아니 나나가 맞겠지. 나나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나나란 말인가. 난 바로 답장을 했고 약속 시간을 잡았다.

3. 

나나는 다른 고양이들과 함께 병원 안 쪽 어두운 방에 있었다. 각기 다른 철장 안에 있는 고양이들 사이에서 나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나의 발에는 얇은 비닐이 묶여있었다고 했다. 비닐봉지를 뒤지다가 그런 모양이었다. 매일 밥을 챙겨줬는데도 나나에겐 부족했나보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비닐이 살을 파고들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나흘만 더 있으면 퇴원을 해도 좋다며 입원한 김에 중성화 수술을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길고양이는 수술 후 귀를 살짝 커팅 할 경우 저렴한 비용으로 수술을 할 수 있다면서. 내가 잠깐 망설이자 그녀가 “반반 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좋다고 말했다. “커피라도 한잔 할래요?”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가 커피를 마시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에어컨 수리기사는 내일 온다고 했으니 특별한 일은 없었다. 나나를 보고 나니 마음이 왠지 놓여서 난 그녀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에어컨이 나오는 카페에 앉아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여름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A는 언제나 따뜻한 커피만 마셨다. 심지어 더운 여름에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 A를 보고 있으면 가슴에 땀이 흘렀다. 처음 보는 사람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여름엔 차가운 커피가 역시 최고다. 각 얼음을 입 안에 넣고 굴리자 온 몸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벌써 커피를 다 마시고 와그작 소리를 내며 얼음을 먹고 있었다. 차가운 커피의 맛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카페에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겠지. 

“고양이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닌가. 고양이를 좋아하니까 밥도 챙겨주고 구조까지 해서 병원에 데리고 왔겠지.



“네. 고양이 좋아해요.” 
“그렇구나.” 

다시 정적이 흘렀다. 대화는 어렵다. 괜히 커피를 마시러 온 걸까. 그 때 그녀가 갑자기 나를 보며 ‘풉’하고 웃었다. 

“아니 왜 웃으세요?” 

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역시 사람은 만나는 게 아니었을까. 집에만 있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나나가 보고 싶어서 나온 것뿐인데 역시 병원 주소만 받았어야했다. 

“그렇게 갑자기 사람보고 웃으시면 기분 나빠요.”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자꾸 나왔어요.” 

내가 귀엽다고? 그럴 리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도 저랑 병원에 올래요?” 내일? 에어컨은 오전에 고치기로 했으니 오후에는 시간이 괜찮다. 그런데 내일 또 만나도 될까. 여름은 뜨겁고 감기는 여전한데 나나는 병원에 있고 나는 갑자기 내가 귀엽다는 여자와 마주보고 있다.

2019년 7월 15일 월요일

[젤리와 만년필] 누구세요 나나는

+고양이 문예지 젤리와 만년필 2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1.

나나가 다리를 다쳤는지 며칠 째 절뚝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나는 내가 밥을 챙겨 주고 있는 고양이다. 주로 저녁 무렵에 집 근처에 나타난다. 길고양이를 잡아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 잡아야 되지? 일단 참치 캔이라도 준 다음에 뒤에서 수건으로 갑자기 습격하면 될까? 아니다. 그럼 너무 놀라겠지. 당연히 도망치겠지. 동물농장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덫 같은 것으로 잡기도 하던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 덫은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일 년이 넘도록 밥을 챙겨 주고 있지만 나나를 만져본 적은 없다. 아무리 길고양이라지만 서운한 건 사실이다. 밥까지 챙겨 주는데 한 번쯤은 만질 수 있도록 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길고양이는 사람과 가까워져봤자 괜히 안 좋은 일만 겪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서운하지 않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구상에서 숨 쉬고 있는 나 이외의 생명체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가까워져봤자 이별할 때 남은 질척거리는 감정을 처리하기 더 힘들 뿐이다. 만나면 이별하기 마련이다. 어떤 관계라도 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길고양이라니. 다른 동네에 가버리면 그만이다. 관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어떠한 관계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다. 관계가 변하는 일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신의 영역에 가깝다. 인간관계를 자신의 노력으로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 틀어진 관계는 원상 복구할 수 없다. 아무리 보고 싶다고 발버둥 쳐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법이다.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걸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물론 난 법적으로 성인이다. 술도 마실 수 있고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을 만큼 돈도 벌고 있고 원한다면 고양이를 집에 들일 수도 있다. 그래. 고양이. 엄마는 고양이를 참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어릴 적 엄마는 일본식 주택에 살았는데 쥐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의 엄마는 고양이를 몇 마리 집에 들였다고 한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한 마리 생겼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견이다. 지금도 건강하다. 이제 몇 년 만 더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난 견이를 통해서 관계에 대해서 배웠다. 난 견이를 좋아했지만 견이는 날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지금도 엄마 집에 가면 견이는 나에게 하악질을 해댄다.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한다는 바로 고양이의 그 하악질 말이다. 견이는 하악질을 할 때 온 몸의 털을 세우고 입을 커다랗게 벌린다. 아마 그건 견이가 나에게 하는 욕이겠지. 견이를 좋아하지만 굳이 견이가 이제 와서 나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운하지 않다. 괜찮다. 서운하다는 감정은 귀찮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면 서운하지 않다. 가까워지지 않으면 기대를 할 일이 없고 기대를 하지 않으면 서운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결국은 관계의 문제다.그렇다고 내가 사람이나 고양이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고 착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난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게 싫을 뿐이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너무나 쉽고 뻔뻔하게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지겹다. 난 내가 제일 좋다. 혼자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 그럼 나나의 밥은 왜 챙겨줬느냐고? 나나는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길고양이는 집시와도 같은 존재다. 나는 나나가 내가 주는 밥을 먹을 때 외에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나는 내가 무엇을 먹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관계다. 난 이런 관계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관계가 좋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귀찮다. 그렇지만 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난 괜찮을까.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생각하지는 말자. 미래를 예측하고 두려워하면 인생이 괴로워진다.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나나의 다친 다리를 어떻게 치료해 주어야 하지?

2.

나나를 데리고 동물 병원에 갔다. 나나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덫을 빌리는 과정도 순조로웠다. 덫 안에 참치 캔을 세 덩이로 나눠서 넣어 놨더니 나나가 알아서 덫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이었다. 병원에 가서 보니 나나의 다리에 나일론 실 같은 것이 감겨 있었다. 실을 제거했으나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탓에 뼈가 살짝 녹았다고 했다.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자유로운 영혼인 나나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며칠 병원에서 쉬면 몸도 좋아지지 않을까. 며칠만 늦게 왔어도 다리를 잘라 내야 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괜히 미안했다.물론 내가 나나를 꼭 고쳐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의리 같은 건데 모르겠다. 의리는 친한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나나와 나는 하루 중 몇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만을 공유하는 사이다. 그걸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나는 나와 친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을까. 나는 그저 밥을 주는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실 친한 사이 그러니까 친구가 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 언제나 나에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친구가 없었다. 친구가 없다면 친구랑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엄마는 매일 아침 학교 가는 나에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했다. 친하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인지는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면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실을 같이 가는 사이라면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두 상황을 합쳐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 화장실에서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면? 미안하다. 대답을 원하고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솔직히 말하면 난 사람이 불편하다. 친하게 지내자면서 갑자기 다가오는 사람들은 정말 무섭다. 나는 내가 좋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매력적인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글쎄 조금 다르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나에게 먼저 친해지자고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다가온다는 것은 정말 이상하고 수상한 일 아닌가. 보험 아니면 다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다단계에 탕진할 수는 없다. 사람보다는 돈이 좋다. 이제까지 친구 없이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친구가 생긴다고 뭐 좋을 일이 있겠나. 게다가 돈이 있어야 나나에게 맛있는 참치와 츄르를 먹일 수 있다. 영화도 볼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고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사람과의 관계에 인생을 맡기면 내 인생을 내가 예측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나를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봤자 뒷담화의 주인공이 될 뿐이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의 씹기 좋은 오징어가 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나만 모르면 된다. 그게 편하다. 먹고살기 위해서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온갖 아부를 떠는 삶은 끔찍하다.난 지금이 좋다. 더 큰 돈을 벌고 싶지도 않고 친구나 애인이 필요하지도 않다. 처음부터 친구가 없었던 나 같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모두가 날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난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이렇게 길게 내 이야기를 한 건 정말 처음이다. 어차피 당신은 한국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니까 내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안심이다. 그렇다면 우린 친구일까 친구가 아닐까. 나의 속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한 적은 처음이지만 당신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나나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나의 언어와 나의 언어는 다르니까. 그렇다면 언어가 중요한 걸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3.

나나가 퇴원하는 날이다. 일이 바빠서 한 번도 병원에 문병을 가보지 못했다. 미안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내 얼굴을 보면 반갑기보다 나를 더 미워하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면서 미안해봤자 소용이 없다. 나나를 처음 잡았던 덫에 나나를 넣어서 택시를 타고 동네로 왔다. 나나의 발은 다 나았다고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밥도 잘 먹었다고 했다. 택시 트렁크에 덫을 실으면서 많이 걱정했는데 나나는 얌전했다. 그래도 많이 놀랐을 거다. 병원에서 오는 길에 콩나물국밥 집을 봤다. 뜨끈한 콩나물국밥 한 그릇이 먹고 싶어졌다. 나나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지만 안 되겠지. 병원에서 치료 좀 받게 해준 것뿐인 주제에 나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병원에서 퇴원했으니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서 주고 싶다. 고양이는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국물을 먹으면 속이 사르르 풀리지 않을까. 따뜻한 물에 향기로운 비누를 풀어서 목욕도 시키고 싶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다.나나는 지금 어서 빨리 예전처럼 동네를 자유롭게 누비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걸 바라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냥 나나를 동네에 풀어 주지 않고 이대로 내 방으로 데리고 간다면 어떻게 될까. 의외로 나나가 그걸 원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고양이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별 상상을 다한다. 내가 나나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책임을 진다는 건방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나나와의 관계는 예전처럼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대로 나나를 놔줬는데 나나가 다시 오지 않으면 어쩌지. 나에게 배신감 느껴서 다시는 내가 주는 밥을 먹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럼 너무 서운할 텐데. 서운하다는 감정은 역시 귀찮은데. 전화도 할 수 없는 길고양이에게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큰일이다.온갖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나나를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나나를 풀어 주는 게 좋겠다. 나는 나나의 삶을 알지 못한다. 나나는 길고양이고 나는 사람이다.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방식 자체가 다르다. 같은 사람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내가 길고양이와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나나가 다시 밥을 먹으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 난 그래도 나나를 병원에 데려갔으니까. 나나의 다리를 낫게 해줬으니까. 덫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하나 둘 셋 하고 문을 열면 나나가 뛰어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저기 멀리서 다리를 다친 고양이가 절뚝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누구지? 나는 눈을 찡그리면서 그 고양이를 쳐다봤다. 나나? 나나다. 그럴 리가? 나나는 덫 안에 있는데. 나나일 리가 없다. 나나는 이미 다리 치료를 받고 오늘 퇴원했다. 그런데 저 고양이는 나나다. 나나와 똑같은 색깔의 털과 무늬를 가지고 있다. 몸 크기도 비슷하다.“넌 누구니?”물어봤지만 고양이가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말은 정확하게 하자. 대답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아듣는 언어로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나나가 둘이었나. 그렇다면 누가 나나고 누가 나나가 아닌가. 동물병원에서 오늘 퇴원한 고양이는 나나가 아닌가. 둘 중 누가 나와 소통하던 고양이인가. 아니 소통을 하긴 했나. 소통이란 무엇인가. 진짜 소통을 했다면 왜 난 다른 고양이 두 마리를 구별하지 못하는가. 나는 누구를 나나라고 불렀는가. 애당초 구분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나. 구분을 했다면 대체 뭐가 달라졌을까. 구분이 의미가 있긴 했나.난 나나가 들어 있는 덫을 들고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어쩌면 나나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는 나나와 어떻게 되는 걸까.

2019년 5월 19일 일요일

[아이즈] 세계 자위의 달

+아이즈 우먼스플레인에 기고한 글입니다.

5월은 ‘세계 자위의 달’이다. 세계인들이 다 함께 자위라도 하면서 이 아름다운 봄날을 만끽하자는 뜻일까. 아니면 일 년 동안 할 자위를 5월 한 달에 몰아서 하자는 뜻일까. 어쩌다가 5월은 ‘세계 자위의 달’이 되어버렸을지 궁금해진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93년 조이슬린 앨더스 박사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미국 공중위생국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앨더스는 낙태, 자위, 성교육 등에 대해 소신 있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매번 논란이 되었다. 본래의 취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회자되곤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방송에서 낙태율의 증가를 줄이기 위해서 콘돔 사용법 등 피임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으나,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콘돔을 주라는 거냐며 비아냥거렸다. UN 세계 에이즈의 날 컨퍼런스에서는 자위를 성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가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앨더스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마 그는 많은 이들이 성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동의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기 바빴고 그 결과 앨더스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앨더스가 예비 학생 및 유치원 아동들에게까지 콘돔을 나눠주고 사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가짜 뉴스가 퍼졌다. 어떤 사람들은 콘돔, 자위 등 섹스와 관련된 단어가 등장하면 갑자기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어지는 모양이다. 앨더스의 해임 이후 한 섹스토이 업체에서 분노를 표하고 자위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5월 7일 ‘전국 자위의 날’이었다. 그 후 자위의 날은 규모가 점점 커져 ‘세계 자위의 달’로 발전했다. 앨더스가 단순하게 ‘자위’를 말했기 때문에 해임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편견, 사랑과 재생산의 영역이 아닌 섹스 즉 ‘비정상’적인 영역의 섹스인 낙태와 자위를 언급했다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해임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부당하다. 

‘정상’에서 살짝이라도 벗어나면 ‘섹스’는 부도덕하고 더러워진다. 정상은 종종 사랑이라는 모호한 개념과 동의어가 된다. 사랑은 섹스를 나눌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된다. 사랑으로 맺어진 가정 안에서 부부의 섹스는 ‘부부관계’라는 단어로 존재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는 온갖 사회 문제의 원인이다. 동성 간의 섹스도 이러한 맥락 안에서 ‘사회 문제’가 되곤 한다. 이러한 정상적인 섹스라는 개념은 사랑의 결실을 가져다주지 않는 ‘자위’에도 온갖 낙인을 찍는다. 자위를 통해서는 사랑도 아이도 얻을수 없으니 얼마나 쓸모없게 보이겠는가. 임신을 하기 위해서 섹스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모든 섹스가 임신을 위한 것인 사람은 드문데 말이다. 내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만나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혹시 몰라 드물다고 썼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 강의를 갔다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삽입이 더 좋아요, 클리토리스 자극이 더 좋아요?” 우리는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삶을 살아간다. 한 가지만 먹거나 한 가지만 입거나 한 사람만 만나며 살아가지 않는다.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기 어려워 짬뽕과 짜장면을 동시에 먹기도 하고, 오늘은 꽃무늬 티셔츠를 입었다가 내일은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기도 한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굳이 한 가지에 머물 필요가 없다. 잠자기 전 몸의 이완을 위해서 섹스토이를 이용해 자위를 할 수도 있고, 파트너와의 섹스를 더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성기를 만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오늘 즐겁게 삽입 섹스를 했더라도 내일은 문지르는 섹스를 할 수도 있다. 오늘은 손가락 한 개만 넣고 싶지만 내일은 두툼한 딜도를 넣고 싶을 수도 있다. 우리의 몸은 매일매일 달라진다. 자위를 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다. 자위를 하지 않는 이유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자위를 시도해보지 못하는 이유가 자위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면, 5월 ‘세계 자위의 달’을 맞이해 그 편견을 살짝 내려놓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