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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일 목요일

[여성신문] 섹스를 말하는 여자들을 위하여

 +2020년 여성신문 SXF 연재에 실었던 글입니다. 


사실 암컷이 더 밝히지, 숫컷보다

5년 전 책 <이기적 섹스>를 내고 한 언론사와 했던 인터뷰 기사가 떴을 때 그 밑에 달린 댓글이다. 여자가 섹스를 말하니까 당황한 나머지 이런 댓글을 달게 된 걸까? 기사에는 내가 어쩌다가 섹스를 말하는 책을 내게 됐는지 적혀 있었다. 자신의 섹스 경험을 과장해서 떠벌리고, 고수인 양 가르치려고 드는 남성들. 그리고 그런 남성들에게 끌려다니듯 섹스를 하게 되는 여성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안전하지 못한 상황들. 그럼에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사회.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을 책으로 담고 싶었다는 내용이 세밀하게 인터뷰 안에 녹아 있었다. 물론 넘쳐나는 기사 홍수의 시대에서 기사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는 사람은 없다. 댓글을 단 사람도 그랬을 거다. 그러나 열심히 말을 하는데 한참을 듣지도 않고 멍 때리다가 ‘어, 여자도 섹스하네’ 수준의 반응을 하는 사람은, 역시 별로다.

섹스에 대한 글을 쓴다고 말했을 때 반응도 대부분 이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섹스를 쓰는지보다 ‘섹스’를 쓴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한다. 놀랄 일은 아니다. 섹스의 영역뿐만 그런 건 아니니까. 여성의 말하기는 사적인 영역 취급당해왔고, ‘개인적’인 기분의 표현 정도로 폄하되기 일쑤다. 페미니즘도 섹스도 성폭력도 전부 여성들이 대충 자기 기분을 끄적여놓은 언제 버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구겨진 쪽지 정도로 바라본다. 대통령이 수감 중인 성폭력 가해자에게 힘내라며 꽃을 보내는 세상이다.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너도 좋았잖아’, ‘즐겨놓고 이제 와서 왜 그래’ 라는 어처구니없는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는데 좋다는 말은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못 한다. 호불호를 말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한 개인의 성장은 쉽게 묻히고 만다. 할 수 있어, 여자도 할 수 있다, 파이팅, 유 캔 두 잇 이런 문장은 허무하다.

섹스는 사적인 건데 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글로 남기려고 할까. 여자 몇 명이 모여 교환 일기장이나 돌리면 되지 왜 지면을 통해 글을 쓰려고 할까. 내가 미투 2018분 동안의 이어말하기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고 말했을 때, 수많은 이들은 ‘섹스를 좋아한다더니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며 나를 비난했다. 섹스의 즐거움을 말하며 섹스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던 한 여성이, 알고 보니 성폭력 피해 생존자였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섹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 모든 종류의 섹스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사람들. 분명 그들은 짜장면을 좋아할 것이고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침실에 들어가서 입을 벌리고 너 짜장면 좋아하잖아 라며 짜장면을 입에 처넣어도 짜장면을 여전히 좋아할 것이다. 좋아한다는 짧은 문장 안에 포함돼있는 여러 맥락을 삭제하고, 어떤 상황과 순간 속에서도 좋아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에게 사회는 모 아니면 도다.

나는 끊임 없이 모와 도 사이를 넘나들고 싶다. 섹스와 강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해자의 섹스 욕망을 부풀리고 피해자의 인생에서 즐거움을 삭제하는 사람들, ‘어떤’ 섹스가 아니라 ‘섹스’ 자체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면 결국 혼란 속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여자들이 섹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결국 여성들이 섹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말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넘나드는 우리의 글이 당신을 흔들 수 있길.

은하선 섹스 칼럼니스트·은하선토이즈 대표


2019년 5월 19일 일요일

[아이즈] 세계 자위의 달

+아이즈 우먼스플레인에 기고한 글입니다.

5월은 ‘세계 자위의 달’이다. 세계인들이 다 함께 자위라도 하면서 이 아름다운 봄날을 만끽하자는 뜻일까. 아니면 일 년 동안 할 자위를 5월 한 달에 몰아서 하자는 뜻일까. 어쩌다가 5월은 ‘세계 자위의 달’이 되어버렸을지 궁금해진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93년 조이슬린 앨더스 박사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미국 공중위생국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앨더스는 낙태, 자위, 성교육 등에 대해 소신 있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매번 논란이 되었다. 본래의 취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회자되곤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방송에서 낙태율의 증가를 줄이기 위해서 콘돔 사용법 등 피임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으나,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콘돔을 주라는 거냐며 비아냥거렸다. UN 세계 에이즈의 날 컨퍼런스에서는 자위를 성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가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앨더스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마 그는 많은 이들이 성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동의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기 바빴고 그 결과 앨더스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앨더스가 예비 학생 및 유치원 아동들에게까지 콘돔을 나눠주고 사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가짜 뉴스가 퍼졌다. 어떤 사람들은 콘돔, 자위 등 섹스와 관련된 단어가 등장하면 갑자기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어지는 모양이다. 앨더스의 해임 이후 한 섹스토이 업체에서 분노를 표하고 자위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5월 7일 ‘전국 자위의 날’이었다. 그 후 자위의 날은 규모가 점점 커져 ‘세계 자위의 달’로 발전했다. 앨더스가 단순하게 ‘자위’를 말했기 때문에 해임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편견, 사랑과 재생산의 영역이 아닌 섹스 즉 ‘비정상’적인 영역의 섹스인 낙태와 자위를 언급했다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해임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부당하다. 

‘정상’에서 살짝이라도 벗어나면 ‘섹스’는 부도덕하고 더러워진다. 정상은 종종 사랑이라는 모호한 개념과 동의어가 된다. 사랑은 섹스를 나눌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된다. 사랑으로 맺어진 가정 안에서 부부의 섹스는 ‘부부관계’라는 단어로 존재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는 온갖 사회 문제의 원인이다. 동성 간의 섹스도 이러한 맥락 안에서 ‘사회 문제’가 되곤 한다. 이러한 정상적인 섹스라는 개념은 사랑의 결실을 가져다주지 않는 ‘자위’에도 온갖 낙인을 찍는다. 자위를 통해서는 사랑도 아이도 얻을수 없으니 얼마나 쓸모없게 보이겠는가. 임신을 하기 위해서 섹스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모든 섹스가 임신을 위한 것인 사람은 드문데 말이다. 내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만나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혹시 몰라 드물다고 썼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 강의를 갔다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삽입이 더 좋아요, 클리토리스 자극이 더 좋아요?” 우리는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삶을 살아간다. 한 가지만 먹거나 한 가지만 입거나 한 사람만 만나며 살아가지 않는다.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기 어려워 짬뽕과 짜장면을 동시에 먹기도 하고, 오늘은 꽃무늬 티셔츠를 입었다가 내일은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기도 한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굳이 한 가지에 머물 필요가 없다. 잠자기 전 몸의 이완을 위해서 섹스토이를 이용해 자위를 할 수도 있고, 파트너와의 섹스를 더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성기를 만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오늘 즐겁게 삽입 섹스를 했더라도 내일은 문지르는 섹스를 할 수도 있다. 오늘은 손가락 한 개만 넣고 싶지만 내일은 두툼한 딜도를 넣고 싶을 수도 있다. 우리의 몸은 매일매일 달라진다. 자위를 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다. 자위를 하지 않는 이유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자위를 시도해보지 못하는 이유가 자위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면, 5월 ‘세계 자위의 달’을 맞이해 그 편견을 살짝 내려놓아보는 건 어떨까. 

2019년 5월 14일 화요일

[아이즈] 독일 기업의 성차별 광고

+아이즈에 기고한 글입니다.


©HORNBACH 광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 중 2030 여성 행복도가 가장 낮다는 연구에 관한 기사를 봤다. 이 연구에 대해 최인철 행복연구센터장은 “우리나라는 여전히 위계질서와 가부장적인 문화가 남아있기 때문에 젊은 여성의 부담이 더욱 큰 것 같다”라고 분석했단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 사는 여성들은 어떨까. 적어도 한국에서의 삶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낄까. 물론 행복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주관적인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공간이 나를 지탱해주리라는 믿음과 믿음을 기반으로 세우는 미래에 대한 계획, 그것이 나에게 주는 안정감은 행복의 기본 요건이 아닐까. 믿었던 것, 기대했던 것이 발등을 찍을 때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배신감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노력’만 하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허들을 넘지 못할 때, 이제까지 달려온 길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과 같은 환멸감이 찾아온다. 환멸감과 행복은 다소 거리가 있는 단어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약 2년 간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했다. 독일에 가자 곳곳에서 이미 한국을 떠나온 한국인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독일에서 만난 대학 남자 선배 한 명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래도 여자들은 관심이라도 받지, 한국 남자들은 여기서 살기 너무 힘들어.” 여기서 관심이란 무엇이었을까. 집 앞 슈퍼에만 가도 니하오를 외치며 찡긋거리는 백인 남성들을 말하는 걸까, 버스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 타라고 휘파람을 불던 백인 남성들을 말하는 걸까.

독일에 온 지 일주일 됐다던 한 이십대 여성도 잊혀지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위 아래로 훑어보며 휘파람을 부는 남자들이 너무 많다”라고 말하며 실망스런 표정을 내비치던 그를 말이다. 독일에서 살면서 난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이 그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얼마 전 독일의 DIY 업체 호른바흐에서 광고를 공개한 후 사람들은 분노를 표했다. 어떠한 문제의식도 없이 아시안 여성을 성적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내용의 영상을 보며, 그동안 독일 안에서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느껴왔던 이들이 ‘#나도호른바흐당했다’는 해시태그 운동을 펼쳤다. 그 해시태그에 펼쳐진 경험들을 읽으며 내가 잠시 살았던 독일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독일이나 한국이나 어디건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음해야 할까.

호른바흐 사건 이후 독일에 거주하는 한 한국인을 중심으로 SNS 운동이 퍼졌고, 한국문화원에서도 호른바흐 측에 광고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달라며 항의했다. 그리고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까지 이 사건을 알게 되면서 여러 한국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기사로 다뤘다. 한국 내에서 벌어지던 성차별적 사건에 대한 그 어떤 대응보다도 즉각적이었다. 물론 당연히 그 광고는 성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광고다. 하지만 ‘당연히 이건 성차별이지’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과 언론의 태도를 보며 다소 낯선 기분을 느꼈다. 한국에 만연한 여성을 성적으로만 표현하는 광고들, 그 수많은 광고들을 보면서 그들은 성적 대상화의 문제점을 느꼈을까. 흑인남성을 ‘흑형’으로 백인여성을 ‘금발미녀’로 표현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보며 인종차별의 문제점을 느꼈을까. 굳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적인 상황에서 그건 차별이 아니라며 기계적 평등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 광고를 보고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며 단번에 분노를 표하는 것일까.

같은 사안에 분노를 느끼더라도 그 분노에 대한 이해도가 같을 수는 없다. 이렇게 빠르게 문제점을 읽어내는 현실을 바라보며 몇 년 사이에 인권 감수성이 급속도로 증가했다고 속 편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역시나 호른바흐 관련 기사에 달린 여러 댓글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광고에 등장한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며 동양인들 엿 먹이려고 작정한 광고 같다는 댓글에서부터 일본 여성이니 한국과는 관계없다는 댓글까지 다양하다. 분노의 온도와 방향은 같지 않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난 누구와 함께 손을 잡고 싸울 것인지 생각한다.

[그라지라]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광주 트라우마 센터 계간지 그라지라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질수록 소위 말하는 유명세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유명세란 그야말로 곤욕이다. 다른 사람 이야기면 그런가보다 할 텐데 안타깝게도 남 일이 아니다. 책을 내고 방송 활동을 하면서 나는 일종의 ‘유명세’를 치르는 사람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유명세의 장점은 단점에 비해 매우 적다. 나와 관련된 기사에는 언제나 악플이 넘쳐난다. 덕분에 강의에 가면 이런 질문을 자주 듣는다.

“그 많은 공격을 어떻게 견디세요? 멘탈을 관리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걱정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질문이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오는 공격을 그대로 견디는 건 쉽지 않기에 해주시는 고마운 걱정이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만의 비법 같은 것을 전수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 무엇도 나를 망칠 수 없다고 쿨 하게 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잠깐 멋있게 보이자고 있지도 않은 허세를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향한 악플이나 공격을 멈추는 방법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고소를 하라고 하지만 고소를 해도 흘러오는 길 자체를 원천봉쇄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 괴롭히기가 인생의 유일한 낙인 사람들을 멈추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고 남는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할 지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욕할 거리를 찾아내 입과 손을 놀린다. 심심한 사람들은 심지어 집요하다. 그렇다고 내가 악플 마다 댓글을 달면서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해명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내가 그들을 찾아가 놀아줄 수는 없으니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인터넷 상에서 퍼지는 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그리고 악플은 악플을 부른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옛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뉴욕도 30초면 가능하다. ‘사이버 불링’이라는 사이버 상에서의 괴롭힘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고, 익명 기사에 등장한 인물의 ‘신상털이’도 누리꾼들의 활약만 있다면 순식간이다.

이러한 시대에서의 욕은 단순하지 않다. 그냥 욕을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욕이 될 만한 요소들을 최대한 응축해서 타인을 공격한다. 바꿔 말하면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로 총알을 만들어 사용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욕들 중에서도 유난히 빠르게 퍼져나가는 것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고, 대체로 그런 두려움이나 공포는 사회적 소수자 차별과 맞닿아있었다. 욕은 사용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과 혐오, 선입견이 만연한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글이 자주 올라오는 커뮤니티 ‘일베’에 ‘갤럭시 보지의 소유자 은하선’이라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찬찬히 읽어보니 은하선은 자위를 자주 한다니 분명 보지가 늘어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주만큼 늘어난 보지를 가졌을 거라 생각해 ‘갤럭시 보지’라는 칭호를 선사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는지 단계별로 따라 가보자.

첫 번째, 자위란 섹슈얼한 매력이 없어 같이 섹스를 할 상대를 찾지 못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혼자 방에 쭈그리고 앉아 남 몰래 하는 행위일 뿐이다.
두 번째, 섹스 대신 하는 자위란 삽입을 하지 않고는 성립이 되지 않으므로 뭐라도 삽입하여 자위를 할 것이다.
세 번째, 보지는 무언가를 삽입할수록 늘어나며 탄성이 떨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위를 많이 하면 보지가 늘어나버릴 것이다.
네 번째, 여성으로서 매력이 없는 은하선은 섹스 상대 찾기에 실패해 넘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자위를 많이 할 것이며 그로 인해 우주만큼 늘어난 ‘갤럭시 보지’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갤럭시 보지’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그들은 아마도 은하선에게 성적 모욕을 줄 생각에 신났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도 만나보자. ‘젠신병자’라는 욕이 있다.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며, 트랜스젠더와 정신병자를 혼합해서 만든 이중혐오적인 욕이다. 트랜스젠더를 욕으로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남성 혹은 여성 둘 중 하나로 보이지 않거나 자신이 트랜스젠더로 ‘오해’ 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할 것이다. 정신병자를 욕으로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신질환에 대한 혐오와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본인에게 찍히는 것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정신병자’라는 단어는 장애인비하적인 표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정신병자’를 ‘정신질환자’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둘을 혼합하여 욕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어떨까. 정신병자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자’라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효과’를 예상할 수나 있을까.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과 트랜스젠더를 전부 모욕할 수 있는 말을 욕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인은 ‘정신병자’도 아니고 ‘트랜스젠더’도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 안에서 가능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형과 언니라는 단어를 합성한 ‘형냐’라는 단어도 있다. 주로 형도 언니도 아닌 존재, 다시 말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를 모욕하기 위해서 쓰인다.
욕이 나를 잠식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익숙해지는 것과 전복시키는 것. 마음이 작아지면 몸의 움직임도 작아지기 마련이다. ‘갤럭시 보지’라는 욕이 나를 공격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난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 갤럭시처럼 넓고 반짝이는 보지를 가진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광활한 보지는 여신의 상징 아닌가. 온 세상 만물을 품을 수 있을 정도의 따뜻함과 반짝임은 내가 언제나 갈망하던 것이라고.
나는 이 글이 욕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마음가짐 정도로 축소되어 읽히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계에 떠다니는 욕이 나를 공격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방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는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욕에 노출되기 쉬운 이 세계와 싸워 나가야 한다. 왜 사회적 소수자는 모욕적인 말들을 ‘당연하게’ 들어야 할까. 왜 어떤 사람들은 존재조차 감추며 살아가야 할까.

‘눈치 게임’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앉아 있나. 꾸밈 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언제 누가 강요했냐고 말을 하고, 커밍아웃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개인의 용기 부족이 아니냐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아도 눈치 볼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세계에서 살이 찔까봐 눈치를 보고, 비정상으로 보일까봐 눈치를 보고,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눈치를 보고, 가벼워 보일까봐 눈치를 보고, 천박해 보일까봐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페미니스트가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시대다. 심심하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유행’이 되어버린 세상은 희망이 될까 아니면 절망이 될까. 자극이 전부인 세상에서 페미니즘은 자극이 될까 아니면 비극이 될까. 페미니즘은 타인의 삶을 타인의 입장에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며,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세상을 새롭게 느끼게 해준다. 다른 이의 삶을 섣불리 안다고 말하지 않는 것. ‘이해한다.’는 단순한 말로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 이게 바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의 시작점 아닐까. 

[경향신문] 그들이 미투를 부정하는 건 변화가 두렵기 때문일지도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이다. 소설가 하일지는 한 대학 강단에 서서 이것을 두고 “점순이가 남자애를 강간한 거야. 얘도 미투 해야겠네”라고 말했다. 뿌리 깊은 강간문화에 둘러싸여서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 채 입을 다물고 살던 여성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미투 운동은 고발을 넘어서 연대의 힘을 만들었고 그 에너지가 불러온 사회적 변화는 그야말로 혁명이다. 하일지는 ‘강간’과 전혀 관련 없는 장면을 불러와서 ‘강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희석했고, 미투 운동과 피해자들의 폭로를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구는 것 정도로 취급하며 조롱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2년 전에 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의혹과 다른 문제 발언들이 공개되면서 하일지는 자신이 일궈놓은 잡초밭을 피해가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하일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강단을 떠나겠단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거나 사과를 하지는 않겠다면서. 도리어 본인이 “자존심 깊이 상처를 입었고 학생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단다. 충격을 받은 걸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다가 하일지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게 되었을까. 아니 왜 언제 자신의 발등을 찍을지도 모르는 호랑이 새끼와 같은 학생들에게 믿음을 주어 자존심에도 깊이 상처를 입고 만 걸까. 어떻게 한다면 하일지가 강단을 떠나는 일 이전으로 모든 것을 돌릴 수 있을까. 그가 학생들을 향해 주었던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학생들이 입을 닫는 것이다. 학생들이 강의 중에 성폭력 피해자를 조롱하는 발언을 들어도 흘려보낼 수 있는 굳건함을 갖고, 여기서 입을 열어서 들추었다가는 본인이 매장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껴안은 채로 모든 것을 참고 견뎠다면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방법이 한 가지 더 있긴 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이 했던 언행을 전부 주워 담는 것. 그러나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면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결국 하일지가 말한 ‘신뢰’란 내가 어떠한 성적 모욕을 하더라도 학생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나를 태양과 같은 사랑으로 보듬어 주리라는 믿음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뢰의 근원은 사회가 그동안 묵인해온 ‘강간문화’다. 강간문화는 강간이 만연한 사회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말하는 포괄적인 단어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주변에서 문제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쉽게 탓하고 비웃으면서 살아왔다. 강간문화를 충분히 누린 것이다. 성폭력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봐 오랜 시간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탓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그런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과거에서 건너오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한 말을 굳이 콕 집어 문제적이라고 말하는 세상 때문에 실망했단다.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남은 인생을 보내도 될 줄 알았는데 계획이 무너진 사람들은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는 방법조차 깨닫지 못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아내 외에 어떤 여자와도 일대일로 술자리나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펜스룰’은 일종의 협박이다.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일로 자꾸 남자들을 성폭력 가해자 취급할 거면 애당초 여자들을 껴주지도 않겠다는 치졸한 마음이 한껏 묻어난다. 또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미투의 부작용으로 여자들이 연애하기 힘들어질 거라는 글들이 줄지어 올라오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눈길만 줘도 ‘시선강간’이니 뭐니 떠든다면 남자들은 더 이상 여성과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을 거고, 그렇게 된다면 다소곳이 앉아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려왔던 많은 여자들은 어디 가서 연애를 할 수 있겠냐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면 연애할 만한 ‘여자’를 고를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왔다는 것인가. 그동안 여자를 동료가 아닌 성적인 존재로 바라봤다고 고백하는 것인가. 내가 곧 세상의 중심이며 내가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으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존재는 도태될 것이라는 믿음,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건방진 사고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다.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가정폭력’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1980년대 후반이다. 그전까지는 ‘폭력’이 아닌 부부싸움이나 가정사 정도로 불렸다.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남편들의 폭력은 ‘사랑’으로 쉽게 포장되곤 했다. 말은 힘을 가지고 있다. ‘자꾸 이러면 여자들과 일하지도 연애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협박은 마치 ‘가정폭력’이라는 단어를 자꾸 사용해서 단순한 부부싸움을 범죄 취급하면 남자들이 무서워서 혼자 살지 누가 결혼을 하겠냐고 되묻는 것과 같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실망을 분노로 표출하는 이들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바뀌어버린 세상에선 본인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감 말이다.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면 이미 누구보다 페미니즘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 왜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세상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이 쉽게 폭주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기꺼이 들어간다면 사랑해주겠지만 그 틀을 벗어나 돌발 행동을 한다면 난도질하겠다는 메시지는 오랫동안 여성들을 인형으로만 존재하도록 만들어왔다. 좁은 틀을 주고 그 안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던 사회 속에서 많은 이들은 입을 닫고 고통을 당했다. 미투는 이 모든 것을 들추어내려는 외침이다. 가해자를 향한 법적인 처벌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맥락을 삭제하고 법적인 처벌 안에서의 유효성만을 이야기한다면, 놓치고 가야 할 부분이 많다. 오래되어서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사건이나 이미 가해자와 합의를 본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또 ‘모르겠으니 일단 법대로 하라’는 가해자의 말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리 경찰서를 가라, 한참 전 일을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진다고 들추어내는가,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은 미투 관련 기사 댓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성폭력은 특정한 괴물이 갑자기 골목에서 나타나서 일어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학교, 직장, 클럽, 화장실, 집 등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지인이나 상사, 선생님, 가족, 연인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특히 친족 성폭력이나 권력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은 피해 당시 바로 고소를 하거나 신고를 하기 어렵다. 맥락을 전혀 살피지 못하고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나누는 미투 감별사들과 차라리 이럴 거면 ‘남자끼리만 놀겠다’며 ‘펜스룰’을 외치는 이들이 과연 다른 존재일까.
성폭력 사건을 두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발언으로 핫이슈가 되었던 유시민은 조개를 하찮게 봤다. 여기서 해일은 당장 코앞에 닥친 대선, 조개는 성폭력을 뜻했다. 해일은 그야말로 몰려오지만 조개는 알아서 봉지 안에 기어들어가지 않는다. 그냥 두면 쫓아오지도 않을 조개를 해일이 몰려오는 해안가에서 줍고 있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성폭력은 해안가에 두고 오면 쫓아오지 않을 조개였으며 갯벌에 파묻어버리면 조용할 조개였다. 조개들의 말하기 대회인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2003년 처음 시작해 올해로 16회를 맞는다. 2018년의 지금, 조개들은 어떠한가. 

[경향신문] 성폭력 피해자처럼 입막음 강요 당해…성소수자도 ‘미 투’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성폭력 생존자 여성들의 끊이지 않는 고발이 온·오프라인에서 뜨겁다. 끊이지 않는 폭로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 만연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람들은 이제까지 없었던 것들이 발견되어 빛을 본 것처럼 쏟아지는 성폭력 피해 고발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시아의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는 성폭력이라곤 없는 줄 알았는데 놀랍다는 듯이 말이다.
왜 누군가는 성폭력을 두려워하고 또 성폭력을 말하기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데, 누군가는 새로운 것을 먹어 본 아이처럼 감탄하고 있는가. 왜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현실로 인해 생겨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누군가는 피해의식일 뿐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을까.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성폭력 은폐 의혹을 받은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은 “도대체 누가 성추행 사실을 은폐하였나. (…) 8년이 지난 후 두 여검사(서지현·임은정)가 이런 사실조차 알지 못한 저를 지목하여 성추행 사실을 은폐하였다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답하며, 서 검사의 말이 ‘명예훼손죄’라는 의견을 밝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본인을 중심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현실 세계는 왜 이리도 비좁을까. 
지난 1월13일 나는 고정패널로 출연하던 EBS 프로그램 <까칠남녀>에서 하차할 것을 통보받았다. ‘은하선의 <까칠남녀> 부당 하차 경위’에 관한 기사와 논평은 이미 많이 나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바라며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으려고 한다. <까칠남녀>는 젠더 불평등에 관한 첨예한 주제들을 다루는 토크쇼였다. 낙태, 노브라, 동거, 자위 등 다양한 이슈들을 도마에 올리는 데 성공했고, 시청자 게시판은 항의글로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연말연시를 앞두고 <까칠남녀>는 드디어 뜨거운 감자 중에 감자인 성소수자 특집 방송을 만들었다. 제작진들은 마치 여러 명의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동물원 코끼리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고, 혹여나 진지한 고민과 삶의 경험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무거운 공기가 두툼하게 깔린 방송이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이토록 깊은 제작진의 고민과 패널들의 활약이 만나 궁금증을 풀어감과 동시에 성소수자 당사자의 이야기들이 쫀쫀하게 오가는 방송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이차로 인한 위계질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가 교복을 입고 반말을 하는 <아는 형님> 콘셉트를 빌려온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녹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난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방영날만을 기다렸다. 방영날은 마침 크리스마스였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았다.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방송 예고편이 뜬 이후로 반동성애 기독교인 단체와 학부모 단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칠남녀> PD는 방송을 앞두고 반동성애자들로부터 수십통의 문자를 받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LGBT는 개인을 멸망시킨다, 비이성적이고 잘못된 성도착증이다, 국민 모두를 죽이는 방송을 중단하라, LGBT는 가정을 파괴한다’ 등 하나같이 성소수자 혐오가 가득한 내용의 문자였다. 그들은 성소수자 혐오를 자신들의 정당한 ‘입장’인 것처럼 포장하고 성소수자와 자신을 완벽하게 분리하면서 성소수자 당사자인 나의 존재를 유령 취급하고 있었다. 양성애자인 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국민 모두를 죽이며, 가정과 국가를 파괴하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성소수자는 왜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 흐릿한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그리고 그런 성소수자 차별을 드러내기 위해 방송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왜 개인은 원하지 않는 문자 테러 속에서 괴로워해야 할까. 
나는 페이스북에 <까칠남녀> PD에게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내용의 문자를 더 이상 보내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서 글을 썼다. <까칠남녀> PD의 연락처가 바뀌었으니 항의를 하려면 이 번호로 문자를 보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리고 <까칠남녀> PD의 번호 대신에 문자메시지를 한 통 보낼 때마다 퀴어문화축제에 3000원씩 후원이 되는 번호를 적었다. 하지만 반동성애자들이 내 글을 보고 문자를 보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성명서를 통해 <까칠남녀>에 출연하는 양성애자 은하선을 규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 글을 믿고 그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보내 원하지 않게 퀴어문화축제에 후원을 하게 된 반동성애자들이 생겨나고 말았다. <까칠남녀>의 고정패널이자 누구보다도 방송이 문제없이 나가길 바라며 제작진이 반동성애자들로부터 안전하길 바랐던 내가, PD의 전화번호를 페이스북에 공개적으로 올릴 거라 생각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본인들이 욕하던 존재가 본인들에게 호의를 베풀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글을 내리고 해당 번호는 퀴어문화축제 후원 번호라고 안내를 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문자를 보낸 후였다. 
자신들이 무엇보다 혐오하는 ‘퀴어문화축제’에 후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은하선이 사기를 쳤다고 말했다. 또 인증하기 위해서 자신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올렸다. ‘생명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계신 것, 생명을 죽이는 문화사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방송, 나라의 근간을 해치는 동성애, 학생들을 동성애에 빠지게 하는 방송,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원인, 양성애자에 의해 이성애자에게 에이즈가 펴져 나간다’ 등 문자에는 심각한 성소수자 혐오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떳떳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보지 못한 채 오히려 나를 범죄자로 취급했다. 의도는 분명했다. 나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그 페이스북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런 취급을 당하지 않았을까. 글쎄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충분히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죽이고 국가를 파괴’하는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성소수자의 삶은 이성애자인 본인과 관계없기 때문에 쉽게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성소수자를 나라를 파괴하고 생명을 죽이는 괴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차별과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싸우는 이들은 살아있는 한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
2011년 한양대학교에서는 성소수자 인권위원회 준비위원회가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원회의를 통해 인준받았으나, ‘성소수자가 학내에서 받는 차별은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생들에 의해서 그야말로 ‘공격’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성소수자 인권위원회 건설 여부를 찬반 총투표로 결정하자며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오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게이가 싫으면 여기에 서명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학생들의 증언이 잇따르기도 했다. 같은 해 한양대학교에서는 한 강사가 수업 중 ‘동성애는 엄마가 태교를 잘못해서 생기는 일이니까 태교를 잘하라’고 말했다. 성소수자가 학내에서 받는 차별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누군가에게는 관심 밖의 영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입을 틀어막고 듣지 않으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성폭력 피해자와 성소수자는 본인의 경험을 폭로하며 싸우려고 하는 순간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계에 놓인다. 성소수자 여성은 성폭력과 차별의 경험들을 끊임없이 오가며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참고로 나는 8년 만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가 가해자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2003년 천주교인이자 동성애자였던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육우당이 동성애자를 향한 인신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유령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살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되거나, 유령취급을 당하다가 유령이 되어버리는 것이 성소수자 그리고 여성의 삶이라면 차라리 난 범죄자로 살겠다. 

[경향신문] 건전한 교육방송서 교복 입고 소위 ‘음란한’ 동성애 조장? 섹스는 조기교육하면 안되나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동성애 조장 방송’에 ‘학부모들’이 ‘음란 방송 폐지’하라며 연일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단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울산에서 올라왔다는 한 여성은 방송사 로비에 세워진 방귀대장 뿡뿡이 앞에 콘돔 씌운 당근을 던졌다. 또 한 여성은 아예 절규하며 방송사 로비에 누워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논란의 방송 EBS <까칠남녀>에서 패널로 활약하고 있는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씨를 만나보기로 했다. 
- 오면서 많이 걱정됐다. 방송 이후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 정말 괜찮은가.
“솔직히 말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성소수자 방송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보냈는데 반응이 전혀 없었다면 아쉬웠을 거다. 그분들이 양성애자 은하선, 바이 은하선이라고 불러주시면서 본의 아니게 양성애자 가시화 운동에 앞장서주신 부분에 대해서도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 말씀 전하고 싶다. 다만 앞뒤 맥락을 다 자르고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퍼뜨리는 상황들을 여러 번 마주하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를 ‘음란 기구 파는 여자’라고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것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대체 음란하다는 정의는 누가 내리는 건가.” 
- 섹스토이를 판매하고 있는 건 맞지 않나.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음란 기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폄하라고 보는 건 피해의식 아닌가. 
“내가 이럴까봐 인터뷰는 안 한다고 한 거다. 나 원래 담배 안 피우는데 지금 열 받아서 담배가 다 피우고 싶어진다. 당신 대체 누가 보냈는가. 누구 열 받는 꼴 보고 싶어서 왔나.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 기다리든지 가든지 마음대로 해라.”
코트 하나 걸치지 않고 호기롭게 나갔던 그녀는 추위를 견디지 못했는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실례를 저질렀다. 죄송하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
“아니다.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아마 인터뷰 오기 전에 <까칠남녀> 관련 기사들을 읽고 오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기사에 ‘음란’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음란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음탕하고 난잡하다고 나온다. 사전적 의미가 딱 떨어진다기보다는 애매모호하다. 사람에 따라 음란이라는 표현을 쓰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2014년에 모조 여성 성기가 있는 인형을 판매했다가 ‘음란한 물건’을 진열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풍속영업규제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판결을 내리면서 어떠한 물건을 음란하다고 평가하려면 단순히 저속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왜곡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물론 법적인 의미대로만 ‘음란’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항의 시위하시는 분들이 든 피켓을 보니 교육방송이 아닌 음란 방송이라거나 포르노 방송, 에로 방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더라. 음란이라는 표현을 어떠한 의도로 사용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정도다. 지금 호모포비아들의 행태를 보면 ‘음란’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해서 성소수자를 폄하하고 혐오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또 성소수자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왜곡하고 있다고도 보인다. 그렇다면 ‘음란’한 자는 누구인가.”
- 그러니까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음란’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많이 사용한다고 느낀다는 건가. 
“그렇다. 내가 방송에서 5년째 여성인 파트너와 동거 중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두고 K일보에서 ‘음란 발언을 허용했다’고 기사를 썼더라.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어떻게 보고 있었기에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는 문장이 ‘음란 발언’으로 들리나. 성소수자는 누구랑 살아야 ‘음란’하다는 말을 안 들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 그리고 꼭 이 부분은 넣어줬으면 좋겠다. 해가 바뀌어서 이제 파트너와의 동거 6년째에 접어들었다. 고양이 두 마리랑 넷이 살고 있는데 다들 건강했으면 좋겠다. 기자님은 고양이 좋아하는가. 고양이가 정말 귀엽다. 털이 많이 빠져서 그렇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고양이 키우시면 캔 하나 드리려고 했는데 아쉽다. 한 마리는 턱시도고, 한 마리는 고등어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고양이 이야기를 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아 맞다. 음란.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방송에서는 전부 교복을 입고 나이와 관계없이 서로에게 반말을 했다. 예능 <아는 형님>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데 성소수자들이 교복 입은 것을 가지고도 뭐라고 하더라. 교복을 입고 나와서 동성욕을 부추긴다나 뭐라나. 그분들이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성소수자 학생들을 현실에서 만나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아마 아직 어려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실 거다. 성소수자들이 방송에 몇 번 나온 것 가지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왜 도대체 방송에 나오는 수많은 이성애자들을 보고도 누군가는 성소수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그리고 그렇게 방송 한번만 봐도 ‘동성애자’가 된다면서 왜 굳이 아이들에게 위험하게 ‘동성애 금지’ 피켓을 들게 하는가. 아이들이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가 뭐냐고 물으면 어쩌려고 집회에 데리고 오는 건가.”
- 학생들도 성소수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하다. 호모포비아들이 ‘동성애’라는 단어를 듣고 항문 섹스와 에이즈만 떠올리는 이유도 성소수자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 젠더에 대한 교육은 어릴 때 받을수록 더 좋다. 성교육이라고 했을 때 ‘학생들에게 공부하지 말고 섹스를 하라고 가르치는 거냐’며 분노하는 학부모들이 계시더라. 그분들은 성교육에 대해 너무나 좁은 시각을 갖고 있다. 사실 알고 보면 ‘성’에 대한 교육은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서 이미 진행 중이다.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의 외형적인 특징에 대해 설명하는 동요 ‘곰 세 마리’는 알고 보면 ‘사회 통념상’ 정상이라고 불리는 성 역할과 성 고정관념 그리고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킨다. 요즘 유행하는 동요 ‘상어가족’도 그런 의미에서 ‘곰 세 마리’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문제제기하지 않을까. 이미 ‘섹스’를 가르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섹스’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섹스를 가르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 바쁘신데 오늘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신가.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직 할 말이 많은데 이렇게 끝난다니 무슨 소리요. 기자 양반.”

※ 이 글은 은하선씨의 셀프인터뷰입니다.
 

[경향신문] 꽃뱀이지?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페미니스트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더니 너도나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화려한 연말이다. 그렇다면 작년에 비해 뭔가 나아졌거나 달라진 점이 있을까. 안타깝게도 남성들은 성범죄 가해자의 95%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지 말라’며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 남성이 가해자인 성범죄 사건이 이슈가 될 때마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여 ‘가만히 있는 나를 감히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했다’고 결론 내리는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잠재적 성범죄자’는 성범죄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아직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영원히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여성도 성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당했다며 분노하는 여성은 없다. 그렇다면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남성인 자신이 의심을 받거나 피해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많은 성범죄자 남성들 때문이지 피해자 때문이 아님에도 왜 억울함을 엉뚱한 곳에 표출하는 걸까. 
지난 12월10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커뮤니티 안티페미협회 회원들은 정부서울청사 앞에 모여서 “무고하게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성범죄자가 된 사람들이 즐비하지만, 꽃뱀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며 ‘여성계’의 해산을 촉구했다. 꽃뱀의 정의를 먼저 짚고 넘어가보자. 꽃뱀은 꽃과 뱀의 합성어로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여성 사기꾼을 의미하는 단어다. 꽃뱀을 꽃뱀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문제냐고? 그런 말 듣기 싫으면 꽃뱀 짓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과연 그럴까. 꽃뱀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다채로운 상황들을 보면 꽃뱀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올해 있었던 직장 내 성폭력 폭로 사건들을 살펴보면 ‘꽃뱀’이라는 단어가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쓰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먼저 호식이두마리치킨 사건에서 피해자는 비교적 거액의 합의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꽃뱀’이라고 불렸다. ‘순수한 피해자’였다면 그렇게 큰돈을 합의금으로 받았을 리가 없다는 의견이 꽃뱀 주장을 뒷받침했다. 잘나가는 기업의 회장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도 떠돌았다. 또 다른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인 ‘한샘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도 꽃뱀 누명으로 인해 괴로워했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면 ‘한샘 꽃뱀’이 연관 검색어에 함께 올라와 있을 정도다. 꽃뱀 낙인 앞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사기꾼이 된다. 성폭력 피해자가 꽃뱀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의심받고, 고백해봤자 믿어주지 않을 거란 불안감 앞에서 이야기를 주저하는 피해자가 생겨난다. 꽃뱀의 의미는 더 이상 ‘여성인 사기꾼’에 멈춰있지 않다. 사기 혹은 거짓을 행한 여성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꽃뱀으로 불릴 수 있다. 심지어 연인 관계에서도 소위 말하는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경우 꽃뱀 낙인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저나 꽃뱀이 두렵다면 왜 여전히 강간이 일어나는 걸까. 강간 약물을 구매하면서까지 강간을 계획하는 남성들이 진정으로 꽃뱀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거짓말하고 돈을 요구하는 ‘꽃뱀’이 많아 두렵다면서 강간을 멈추지 않는 건 왜일까. 꽃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남성들은 알고 있다. 이 단어가 가해자를 피해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순식간에 둔갑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남성들은 어쩌면 오랫동안 여성들이 가져왔던 피해자의 자리를 탐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성들이 제발 벗어나고만 싶어서 발버둥쳐왔던 그 피해자의 자리를 남성들은 마냥 부러워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해자 자리의 끔찍함을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마치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성별로 태어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여자로 태어나 남자 돈 뜯어먹으면서 살겠다고 해맑게 대답하는 남성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검색 중에 ‘은하선이 중학교 때부터 강간을 했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글을 발견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읽어보니 2015년에 인터뷰에서 했던 대답 중 일부분을 발췌해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인터뷰 중 중학교 때 있었던 첫 경험에 관한 질문에서 “당시 동네에 칸막이가 있는 다방이 있었는데, 사귀던 대학생과 거기서 키스를 하곤 했다. 그러다 그 남자 자취방에 놀러가 내가 먼저 덮쳤다. 무척 경험하고 싶었다. 남자는 몹시 당황스러워했는데, 싫다고 하진 않았다. 그 남자도 그게 처음이었다. 내 성기가 어딘지도 찾지 못해 내게 물어볼 정도였다”라고 대답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여기서의 ‘덮쳤다’는 표현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는데 권력적 위계를 이용했다거나 물리적 힘으로 제압해 억지로 강간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당시 난 중학생이었고 상대방 남성은 법적 성인이었으며, 그 남자가 내 성기의 위치를 직접 확인하면서 나에게 질문했다는 말에서 내가 억지로 성기 삽입을 시도하거나 강간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전후 사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맥락을 삭제한 채 ‘중학교 때부터 강간을 했을 수도 있다’라는 문장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홍준표 돼지 발정제 사건’을 비판한 내 글을 인용해 ‘강간모의는 잘못됐다면서 본인이 했던 동의 없는 섹스는 문제가 없느냐’는 취지의 글까지 함께 올린 것은 나에게 분명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였기에 그 글의 작성자를 고소했다. 그리고 오늘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다녀왔는데 조사 과정에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은 나에게 “남녀를 떠나서 여자 중학생도 남자 대학생을 강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남자라고 마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덮쳤다는 표현이 강간을 의미할 수 있어서 그 사람이 오해할 만했다. 일반인들이 그 인터뷰를 본다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말을 하면서 나를 강간범으로 몰아갔다. 피해자로 조사를 받으러 갔던 나는 순식간에 가해자가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나는 인터뷰의 맥락상 덮쳤다는 표현은 먼저 주체적으로 섹스를 원했다는 의미이지 상대방이 거부하는데도 폭력적으로 성기 삽입을 감행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내가 강간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내용을 퍼뜨린 것은 문제적이라고 말했으나, “강간을 안 했다는 것은 본인의 주장일 뿐”이라는 말까지 수사관의 입을 통해 들어야 했다. 어쩌면 수사관이 나를 합의금을 노리고 별것도 아닌 일을 고소까지 한 ‘꽃뱀’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나는 당시 내가 의제 강간이 성립되는 나이인 만 13세였다는 이야기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라고 하더라도 성별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몇 번이나 여자 중학생도 성인 남자를 강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수사관 앞에서 나는 세상의 ‘평등’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네가 말했잖아. 그게 강간이면 이것도 강간이겠네. 너도 강간했을 수 있어’라며 맥락을 삭제하는 것이 ‘평등’을 향한 길인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평등’한 수사인가.
‘남자도 성폭력 많이 당한다. 요즘에 얼마나 꽃뱀이 많은 줄 아냐. 거짓말 치고 남자 돈 뜯어내는 여자들 정말 무섭다. 여자인 게 무슨 벼슬이냐. 여자보다 남성이 더 살기 힘든 세상이다’라는 말에는 남성인 성폭력 피해자의 존재가 쉽게 묻히곤 하는 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보다 사실을 축소시켜 피해자를 어떻게든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싶어하는 더 큰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가해자가 재빨리 달려가 피해자의 의자를 빼앗아 앉으면서까지 피해자가 피해자로도 남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현실. 그 현실을 폭로하려는 이들을 ‘그렇게 따지면 너도 가해자’라며 비꼬는 사람들이 만연한 진실 속에서 정작 피해자는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할까. 강력 성범죄 사건의 타이틀에까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쓰면서 끊임없이 성욕과 성폭력을 연결짓는 끈끈한 ‘강간문화’에도 절망하지 않고 싸워왔던 여성들의 역사는 왜 이리도 쉽게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리는가. 만약 여성들이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앉아왔던 피해자 자리를 남성들이 모두 ‘선점’한다면 어떻게 될까. 남자도 여자들이 당했던 만큼의 성범죄를 당하는 세상이 혹시 당신들이 원하는 ‘평등’한 세상인가. 

[경향신문] 원조여성이란 누구인가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여성이라고 믿는다. 아마 앞으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내 입으로 직접 ‘나는 여성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일까. 뭘 보고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일까. 혹시 내가 신뢰 가는 얼굴을 가졌기 때문일까. 친분 있는 사이라면 그동안의 내 행태를 보고 믿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나와 전혀 친분이 없고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도 내가 여성임을 철석같이 믿는다. 심지어 내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지어냈다고 하시던 분들도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왜일까.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나를 여성이라고 인식할까. 외부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높은 확률로 먼저 나오는 대답은 ‘성기’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의 성기를 본 적이 있는가. 내 성기를 밝은 곳에서 자세하게 본 경험을 한 사람은 아주 한정적이다. 게다가 난 내 성기 사진을 공개한 적이 없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어떤 성기를 가졌는가에 따라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성별 중 하나로 지정당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기가 곧 성별을 증명한다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내 성기를 한번도 살펴본 적 없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성별은 성기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가수 연습생 한서희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트랜스젠더(MTF)는 여성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서 화제가 됐다. 한서희는 ‘고추가 있는데 어떻게 여성이냐’며 여성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한서희의 글이 올라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가 한서희를 비판하며 ‘자궁적출 수술을 하면 여자가 아닌가?’라는 요지의 질문을 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인 한서희를 공격한 것으로 비치는 바람에 결국 하리수는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리수는 사과문의 마지막 문장에 ‘여성인권에 앞장서는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각종 SNS에 하리수는 진짜 여자가 아니라는 누리꾼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 
하리수는 2001년 한 화장품 회사 광고를 통해 데뷔했다. 광고 속 하리수의 얼굴은 다른 남성의 목젖과 합성된 모습이었고 ‘여자보다 더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남성의 상징’인 목젖을 가지고 있는, 그러니까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부분이 부각됐다. 하리수는 한 인터뷰를 통해 방송을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데뷔 당시 각종 언론과 방송은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여자보다 더 예쁜’이라는 수식어로 그녀를 소개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방송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놀랐고, 많은 사람들이 하리수를 통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의 등장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진짜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남자였다가 여자가 된 거야? 진짜 여자도 아닌데 저렇게 예쁘단 말이야? 그럼 성기도 수술한 거야? 그동안 자신을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많은 이들이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하리수에게 섹슈얼한 매력을 느꼈고,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진짜 여자’가 아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여성이 아니었던, ‘원래 남자’였던 하리수를 ‘섹시하다’고 인지하게 되면 본인의 이성애자 남성 정체성이 훼손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하리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형’과 ‘언니’를 합성한 ‘형냐’라는 단어를 만들어 부르며 하리수의 여성성을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 남성 개그맨은 ‘사이비 냄비’ ‘인공보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하리수를 공공연히 성희롱하기도 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내 성기를 본 적이 없음에도 나를 당연하게 여성이라고 인식한다. 성기는 ‘생각보다’ 성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건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본 적도 없고 볼 일도 없는 타인의 성기를 가지고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현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하리수의 여성성에 반기를 들고 ‘원조 여성’ 운운하는 이들은 더 이상 ‘이성애자 남성’에 한정되어있지 않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진짜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의 삶과 경험을 가질 수 없으므로 ‘챙길 대상’이 아니라는 이들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삶과 시스젠더(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정체성'이 사회에서 지정받은 '지정성별'과 일치한다고 느끼는 사람) 여성들의 삶은 다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노력’으로 쟁취해야 하는 삶과 굳이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같은 시스젠더 여성들끼리라 할지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여성의 편을 들어주거나 다른 여성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떤 여성들은 살면서 성차별을 겪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여성들은 나도 여자지만 페미니스트는 너무 무섭다고 말할 것이며, 또 어떤 여성들은 성범죄는 여성이 야한 옷을 입어서 생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다. 이런 상황에서 자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면 ‘원조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원조 여자’가 살면서 겪은 성차별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 여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당신에게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애인을 여성이라 생각하고 연애관계를 지속했으며 주기적으로 성관계도 하고 있다. 당신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애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애인이 할 말이 있다며 분위기를 잡는다. “나 사실은 트랜스젠더야. 자기 만나기 몇 년 전에 성기 성형 수술도 받았어. 그동안 사실대로 말 못해서 미안해.” 당신이 만약 이 상황에서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면 그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사회적인 편견 때문일까. 애인의 성기가 수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일까. 애인에게 자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일까.

또 다른 상황도 떠올려보자. 이번에도 당신에게는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있다. 당신은 애인을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성관계도 하고 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인이다. 그런데 애인이 몇 년 전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당신은 애인과 계속 만날 것인가. 아니면 헤어질 것인가. 질문이 이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서로 사랑하는데 자궁의 유무가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에는 반대하지만 내가 사귀고 싶지 않다는 것은 내 개인 취향 아니냐고 묻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번쯤은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이 여성을 좋아하는 이성애자이지만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스젠더만 좋아한다면, 여기서 본인이 좋아한다고 믿었던 ‘여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사회적인 성차별의 근간을 흔들기 위해서는 ‘성기’만으로 사람을 여성과 남성 중 하나로 나누고 그 틀에 딱 맞아떨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를 ‘변태’라고 부르며 ‘정상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성기’ 모양새로 남성 혹은 여성 둘 중 하나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협소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지구인으로서 항상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트랜스젠더는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성별 이분법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존재다. 성기의 모양만으로 ‘원조 여성’ ‘원조 남성’을 가르고 배척하는 것이 과연 성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일까. 아닐 것이다. 

[경향신문] 페미니스트에게서 비운의 과거만 기대하는 당신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페미니스트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사정’보다는 ‘사건’에 가까운 일을 상상하곤 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 부모님이 매일같이 치고 박고 싸우는 집안에서 자랐다거나, 아빠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골프채를 휘두르는 탓에 집 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다거나, 부모 없이 자란 탓에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서 옆집 아저씨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거나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한 여자를 페미니스트로 성장시켰으리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파란만장한 사건 속에서 성장한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확률이 높을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뜻은 삶이 더 이상 멈춰 있도록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으니까. 그러나 나는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며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끈질기게 어쩌다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물으면서 저런 종류의 사건에 대한 고백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직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화를 차마 표출할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남성 혐오 속에 갇혀 살다가 안타깝게도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린 비운의 한 여성, 그게 바로 내가 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일부러 성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라는 사실을 감추기도 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람들의 넘쳐나는 동정과 호기심을 한 번 더 견디겠다는 의미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만졌느냐는 질문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자신이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은 사실 거기서 거기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만졌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왜 당시에 싫다고 말하지 못했느냐는 질문까지가 한 사이클이다.
질문에 답하기보다 더 힘든 건 동정받기다. 질문에는 답이라도 하면 되지만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나도 딸이 있어서 잘 아는데 내 딸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안된다. 너희 부모님은 정말 힘드시겠다, 부모님께 잘해 드려라’라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잡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를 위로하겠다는 것인지 내 부모님을 위로하겠다는 것인지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자신의 딸을 위로하겠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선의를 가지고 하는 모든 행동이 옳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 
나 자신이 바로 성폭력 생존자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방송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때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무조건 동정을 받는 것이었다.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섹스칼럼니스트이자 양성애자가 ‘되어버린’ 모든 과정을 성폭력 피해자라는 나의 정체성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매우 곤란한 일이다. 나에게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중요한 부분이지만 나를 이루는 정체성은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성폭력 피해자도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말 그대로 존재를 의심받기 시작했다. 의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성폭력 피해자가 저렇게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일을 얼굴 드러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렇게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왜 그 당시에 따지거나 싸우지 못했을까. 무슨 꿍꿍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성폭력 가해자가 조사 과정에서 나에 대해 했던 말과 일치한다. 저렇게 말 잘하는 애가 나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 성폭력 가해자의 주장이었다. 얼마 전 한 변호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방송에서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말할 때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줄 알았단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묻자 말도 잘하고 너무 밝고 긍정적으로 보여서 그런 일을 직접 겪었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와 만나왔던 변호사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두 번째, 한 명의 여자가 살면서 저렇게 많은 일을 당했을 리가 없다. 분명 지어냈을 것이다. 사실 그건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일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내 인생에서만 이렇게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도대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 않다. 백 번 양보해 내가 지어냈다고 치자.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는가. 분명 내가 겪은 일이고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겪은 일인데, 나를 양치기 취급해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성폭력 피해자가 합의금만 받아도 무조건 꽃뱀이라고 모는 세상에서 자신이 겪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서까지 자기 자신을 성폭력 피해자라고 말하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은 나에게 끈질기게 e메일을 보내 사건 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차라리 불쌍하고 재수 없는, 인생 기구한 여자 취급이라도 해줄 때가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성폭력 피해자는 입을 다물게 된다. 연대해주는 이들보다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고 느끼는 순간 성폭력 피해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입을 막는 것일까. 듣기를 거부하고 존재를 지워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애초에 의심은 무엇을 위한 의심이란 말인가. 
세 번째, 성폭력 피해자라기에 내가 충분히 예쁘지 않다. 이 문장은 이해가 잘 안되실지 모르니 설명을 덧붙이겠다. 성폭력이란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보기에 성폭력 피해자란 예뻐야 한다. 예쁘지 않은 여성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성폭력이란 성적 매력이 넘치는 예쁜 피해자가 밖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그들이 보기에 나는 성폭력을 당할 만큼 ‘섹시’하거나 ‘예쁘지’ 않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성폭력을 당할 만큼 예쁘지 않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예쁜’ 여성은 언제든지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예쁘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왜 누군가는 평가받고 성폭력을 당하는 존재가 되는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혹여나 사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검열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도록 만드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나는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성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다. 피해자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가두는 한 피해자는 납작한 평면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 틀에서 벗어난 나와 같은 성폭력 피해자는 없는 존재이자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더 안타까운 건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내려놓아도 나는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어려운 존재라는 점이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나란 존재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섞어놓은 멋진 글을 본 적이 있다. 
‘성폭력을 당한 은하선은 충격을 받고 남성 혐오주의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남성과 더 이상 섹스 혹은 연애를 할 수 없는 비운의 여성이 되는 바람에 여성과 만나고 섹스를 하는 레즈비언이 되었다. 레즈비언이 된 은하선은 예쁜 여성과 만나고 섹스를 하기 위해서 남성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더욱 극심한 남성 혐오주의자가 되었다.’
대충 이러한 흐름의 글이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고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내가 그다지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경향신문] 여성에게 성을 탐할 틈을 허하라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강의 후 섹스토크를 하던 중 제주도에 있는 한 인적이 드문 오름에서 섹스를 해봤다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탁 트인 오름에서의 섹스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난 당장 그녀가 섹스했다는 그 오름으로 달려가서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치마 밑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을까. 울창한 나무가 나의 섹스를 응원하는 경쾌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 다른 도시에서 강의가 있었고, 난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성이 손을 들고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제주도 오름에서 섹스해봤어요.” 
얼굴도 본 적 없는 두 여성이 ‘제주도 오름에서 섹스’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제주도 오름에서 섹스를 해본 두 여성이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오름에서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으며 섹스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마음속 비밀로만 간직되었을지 모른다. 말하는 순간 비로소 역사가 되어 살아난다. 섹스토크를 진행할 때마다 여성들이 섹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다.
세상이 바뀌었고 무려 로봇 청소기가 바닥 청소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섹스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워한다. 섹스라는 단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여성은 그야말로 쉽게 다리 벌리는 여성 취급을 받는다. 섹스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편견 어린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이란 많지 않다. 섹스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선입견을 걱정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야말로 ‘권력’이다. 물론 권력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게 권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섹스란 파트너와의 ‘성관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기, 자위를 포함한 성과 관련된 모든 이슈를 말한다. 
섹스에 대해서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권력의 배분은 우리가 차마 그 권력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유아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터넷 서점에서 ‘고추’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수많은 어린이 도서가 나온다. 여기서 고추란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바로 그 고추다. 남성의 성기는 동화책의 제목이 된다. 그렇다면 ‘조개’는 어떨까. 혹시 모르니 조개도 한번 검색해보았다. 조개가 들어간 제목을 가진 여러 가지 도서를 검색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바로 그 조개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키워드가 잘못된 건 아닐까. 머리를 굴려 이번에는 ‘잠지’라는 단어로 검색해보았다. <할아버지 잠지>라는 시집이 한 권 나왔다. 이것도 아니다. ‘보지’라는 단어로 다시 검색해보니 <가보지 않은 길>,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책뿐이었다.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된 동화책은 결국 한 권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고추 달린 놈으로 불리면서 자랄 때 다른 누군가는 이름조차 없는 성기를 가지고 자란다는 건 분명 불공평하다. 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부를 만한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현실이다. 
얼마 전 <하는 여자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행사는 섹스를 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으자는 취지로 기획해 올해 2회를 맞았다. 마치 세상에 없는 듯이 취급받았던 ‘성기’ 드러내기의 중요성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작년에는 ‘성기’ 이름 콘테스트, ‘성기’ 모양 자수 브로치 만들기, 색칠하기 등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했고, 올해도 ‘성기’ 모양 비누 만들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비누 클레이로 본인이 원하는 모양의 ‘성기 비누’를 만드는 워크숍이었다. 비누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성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거나 상상해보게 된다. 여성들이 모여서 손으로 조물조물 뭔가를 만드는 평화로운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뿌듯한 기분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왜 애당초 여성의 성기는 없는 것처럼 취급받았나. 누군가의 성기는 마시면 벌떡벌떡 선다는 ‘벌떡주’라는 술의 디자인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큼지막하게 조각상으로 만들어 공원 이곳저곳에 전시하기도 하는데 왜 내 성기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을까. 누군가의 성기는 해학이 되는데 왜 내 성기는 해악이 되는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신체의 일부분이 웃음거리 취급받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라고. 그러나 그건 아예 없는 취급받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렇게 ‘성기’라는 신체의 일부분만 살펴봐도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이 얼마나 다르게 취급받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는데 여성이 받는 차별이 어디 있냐며 지금은 역차별 시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적어도 네 성기에는 ‘귀여운 이름’이라도 있지 않느냐고 화를 내도 못 알아듣는 이들에게 과연 밝은 미래가 있을까. 
나는 여성들이 만든 형형색색의 다양한 ‘성기 비누’를 보면서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혔다. 워크숍이 끝난 후 ‘말하는 여자’ 토크 콘서트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들이 각자의 경험에서 비롯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자리였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많은 참가자들이 “너무 좋았다”는 소감을 나눠주었다. 앞으로 이렇게 섹스에 대해서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나는 섹스토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자위 방법을 모르는 남성들은 매우 적지만, 자위 방법을 모르는 여성들은 생각보다 많다.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되는지 누가 하나하나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여성들, 클리토리스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는 여성들 앞에 성기 사진집을 펼쳐놓고 워크숍을 한 적도 있다. 물론 모든 여성이 자위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모든 여성이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분명 느리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고 여성들의 섹스도 점점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위도, 클리토리스도 모르는 여성들이 있다. 그 여성들이 너무 느린 걸까. 그렇다면 이 여성들을 세상의 변화에 뒤처진다며 나무랄 것인가. 아니다. 유아기 때 이미 빼앗겨버린 그 ‘권력’을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찾아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섹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더라도 색안경을 끼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바라봐줄 수 있는 공간 안에서 여성들은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 공간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자위 방법을 모르는 여성에게 이것이 자위 방법이라며 일괄적으로 가르쳐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위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하나씩 공유하는 자리다. 조금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섹스 판타지도 나눌 수 있겠다. 상상의 영역에까지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일단은 자유롭게 놓아두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겠다. 어떻게 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서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영역에서 다른 이의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이렇게도 해볼 수 있고 저렇게도 해볼 수 있으나 굳이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자리 안에서 많은 여성들은 편안함을 느끼며 변화할 수 있으리라. 여성들의 섹스토크가 필요한 이유다.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덧붙인다. 모든 여성이 섹스를 하거나 자위를 하거나 성기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섹스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힘을 되찾자는 뜻이다.


[경향신문] 유혹하고 싶다면, 희롱하지 말지니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섹스하자며 무작정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나에게 메일을 보내는 이들은 왜 전부 남성들일까. 다양한 스펙과 나이를 가진 남성들이 나에게 섹스를 제안하는 메일을 보내곤 한다. 어떤 50대 남성은 나이에 대해서 선입견 갖지 말고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첨언을 덧붙여서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긍정적인 답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
섹스에 대해서 글을 쓰는 여자니까 언제든지 섹스를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여성들은 나에게 섹스하자고 단 한번도 메일을 보내지 않았을까. 바이섹슈얼이라고 커밍아웃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른 새벽, 기차역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바람이 쌀쌀했고 꽤 오래 기다렸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때 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남성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더니 나에게 어디 가냐며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조금 뒤에 차는 다시 떠났다. 왜 나는 그 차에 올라타지 않았을까. 아마 많은 여성들은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호의를 단순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섹스하자는 메일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 단순한 유혹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태워주겠다는 제안에 공포를 느끼지 않고 단순한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살기 편했을까. 
언제든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남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남자로 살기 정말 힘들다고. “지하철에서 그냥 자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몰카를 찍는다고 오해를 받아서 짜증났다. 계단에서 치마를 가리고 가는 여성들을 보면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불쾌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남자들을 보면 참 부럽다. 물론 나는 남자들의 삶에 대해 전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잠재적 성폭력 피해자’로 사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한다. 섹스를 하자며 메일을 보내는 남자와 새벽에 자신의 차를 타라고 제안한 남자는 잠재적 성범죄자로 취급받아서 억울한 남성의 삶을 살아왔거나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본 적은 없을 거라 확신한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그리도 쉽게 내뱉었나보다. ‘여자는 꽃’이라거나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맛이지’와 같은 말들을 한 점 부끄럼 없이 말이랍시고 만들어내는 ‘일부 남성’들이 있다. 듣는 여성의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뻐서 듣기 좋으라고 꽃이라고 했을 뿐인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여자들 때문에 무슨 말을 못하겠다며 억울함을 호소할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두 번째 궁금증이 생긴다. 왜 어떤 남성들은 여자들이 싫어하는 짓을 계속하면서 여자들과의 연애 혹은 섹스를 꿈꾸는가. 더 쉽게 풀어서 말해보겠다. 일면식도 없는 여자에게 섹스를 하자며 메일을 보내고, 자신의 차에 타라고 제안하고, 휘파람을 불고, 위아래로 훑는 남성들은 뉴스를 보지 않는가. 정말 그런 방법으로 여자와의 연애 혹은 섹스가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안될 거 알지만 혹시 모르니 찔러보는 건가. 아니면 사실은 여성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가. 그랬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모든 관계는 상호 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에 당연한 관계는 없다. 친구 관계도, 가족 관계도,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어떠한 관계도 긍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이런 당연한 현실 속에서 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여성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가. 자신이 그만큼 매력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자와 연애를 하거나 섹스를 하는 것이 가능해지려면 그러니까 여성들이,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성을 무조건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남성을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원하는 여자들이 그만큼 많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더 이상 여성들은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성과의 결혼이 여성에게 ‘행복’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게 된 여성들은 혼자 살기 혹은 남성과 살지 않기를 결심하고 있다. 
남성들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정말 이기적이라는 말을 열심히 중얼거려 보지만 여성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정말로 ‘이성애자 남성’들은 여성과 동반자로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가. 왜 여전히 성희롱을 하면서 농담이라고 우기고 있는가. 각종 자기계발서가 쏟아져 나오는 한국 사회에서 왜 남성들은 여전히 젠더 감수성 제로인 상태로 자신을 방치하고 있는가. 왜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가. 그리고 도대체 왜 사회는 이런 남성들을 응원하고 있는가. 
얼마 전 모 의대에서 남학생 11명이 성희롱 발언을 해서 징계를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얼굴과 몸매가 별로지만 섹스하고 싶은 여학생’을 고르고 얼굴이 별로니까 봉지를 씌워놓고 하면 되겠다는 말을 주고받은 것이 공개되면서 징계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놀랍게도 뻔뻔하다는 사실이다. 반성은커녕 ‘분위기에 휩쓸려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한 것뿐’이라며 징계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징계처분 무효 확인 소송을 냈다. 그리고 재판부는 징계처분 무효 확인 소송의 결론이 날 때까지 징계처분의 효력을 정지했다. 또 올해 2학기 수강신청과 교과목 수강을 금지해서는 안된다고 학교 측에 명령했다. 그리하여 성희롱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저런 이야기 안 하는 남자가 어디 있냐며 이들을 안쓰러워하는 남성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째서 이러한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있는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발전하고 있는가.정말 여성과의 연애 혹은 섹스를 원하고 상호적인 관계 맺기를 원한다면 어째서 여성들이 싫어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가. 여성과 섹스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강하게 전시하기 위해서 굳이 여성을 성적으로 모욕할 필요는 없다. 상대방을 성적으로 모욕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성적으로 욕망할 수 있다.
예언을 하나 하겠다. 남성연대 안에서 끈끈함에 취해 서로를 응원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여성과 연애하기 더욱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 어떤 여성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적으로 모욕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여성들은 위험하지 않은 남성과의 관계를 선호할 것이며, 젠더 감수성이 높은 남성들이 연애시장에서 각광받을 것이다. 나를 성적으로 모욕하지 않는 남자, 나를 술자리 안주로 소비하지 않는 남자, 나를 헐값으로 깎아내리지 않는 남자, 더 나아가 나를 강간하지 않고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를 원하는 여성들은 더 많이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성을 만나고 여성과 연애하고 여성과 섹스하는 여성들도 더 많이 늘어날 것이다. 참고로 나는 요즘 들어 여성을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여성들로부터 자주 받는다. 

[경향신문] 무엇이 그들의 ‘성욕’을 드러내게 했나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대전의 한 중학교에서 여성 교사 수업 중 열 명에 달하는 남학생들이 집단으로 성기를 드러내는 성범죄 사건이 벌어졌다. 해당 수업을 진행했던 여성 교사가 학교당국에 신고했고 이후 많은 언론들이 앞다퉈 이 사건을 다뤘다. 어떻게 학생이 감히 선생님 앞에서 자위를 할 수가 있느냐며 ‘교권 추락’을 본질적인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과 ‘우리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충격적인 일’이라는 증언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위’를 하는 ‘학생’이 충격적인 것인가, ‘선생님’ 앞에서 ‘자위’를 하는 ‘학생’이 충격적인 것인가. 
정말로 ‘교권 추락’이 문제라면 ‘학생’ 앞에서 ‘자위’를 하는 ‘선생님’은 어떠한가. 여성 교사가 아닌 남성 교사가 수업하던 중이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느냐는 질문에 교육당국이 남성 교사 수업 중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대답하는 순간, 성적 쾌락을 위한 자위행위가 아닌 음모 길이 등을 비교하던 단순한 장난이라고 대답하는 순간, 이 절망의 구렁텅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질문을 다시 해보겠다. 성기를 내놓는 행위로 상대방을 불쾌하고 두렵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성기를 내놓겠다고 결심하는 존재는, 어째서 언제나 남성인가.
학교에서 학생 혹은 교사가 성기를 드러내고 자위를 해서 문제가 된 사건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2013년에는 교사가 수업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학생에게 주먹을 휘두른 후 바지를 내리고 자위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자위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낸 것이다. 또 2016년에는 교사에게 훈계를 받은 학생이 갑자기 자위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분노 표출의 방법으로 자위를 선택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위’를 한 ‘교사’도 ‘학생’도 모두 남성이라는 것. 남성의 성기는 내놓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될 수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남성들은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이용할 수 있다. 반면에 여성들은 어떠한가. 그 어떤 여학생도 수업 중에 교사 앞에서 성기를 드러내고 자위를 하지 않으며, 그 어떤 여자 교사도 학생 앞에서 자위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남성들에게 언제든지 성기를 드러내도 괜찮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은하선의 섹스올로지]무엇이 그들의 ‘성욕’을 드러내게 했나
EBS의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에서는 얼마 전 ‘자위’에 대해 다뤘다. 잘못된 자위로 인한 위험성 등을 다룬 교육적인 방송이었다. 그러나 “매일 하는 정도”라는 나의 발언이 화제가 되면서 약 20회에 달하는 기사가 나갔고 결국 방송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권고 조치까지 받게 되었다. ‘교육적 측면이 없는 자위에 관한 과도한 언급이 문제’라는 것이 방통위의 공식 입장이었다. 모 위원은 방송을 보고 “이 방송이 EBS에서 나간 것이 맞는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방송에서 남성 패널들이 자위 방법 등을 언급하기도 했으나 그건 오히려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려 여성이 자위를 매일 한다고 방송에서 이야기한 것이 ‘충격적’이었나 보다. 방송 이후 ‘매일 자위 하는 여자인 나’는 어느새 남성들이 많이 모인 사이트에서 성기가 우주만큼 늘어나 버린 ‘갤럭시 성기’로 불리고 있었다. 식욕, 수면욕과 머리를 나란히 하는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성욕은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는 걸까. 
자위를 하는 여자는 음란한 여자가 되고 성기가 늘어나 버리지만, 자위를 하는 남자는 그냥 ‘남자’다. 남자의 자위는 성장 과정에 꼭 필요한 당연한 수순이며 성욕을 처리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만, 여성의 자위는 정반대다. 2000년대 초반에 개봉했던 <몽정기>라는 영화가 있었다. 남자 중학생들의 ‘황당하고 짜릿한 순간’인 몽정기를 묘사해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싱그럽고 아리따운’ 여자 교생 선생님의 등장 이후 남자 중학생들은 교생과의 섹스라는 공통의 꿈을 꾸고, 결국 교생과의 섹스에 먼저 성공하는 사람의 소원 들어주기 내기까지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수업을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봤자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단체로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섹스를 꿈꾼다는 사실을 만약 그녀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즐거운 소풍 날, 마시면 여자가 한방에 훅 간다는 음료를 제조해서 자신에게 먹이려 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을까. 교생 선생님이라면 이런 사춘기 소년들의 장난 따위는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패기 정도는 갖춰야 하나. 
이 영화가 남성 청소년들의 성욕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게 정말 ‘솔직한 현실’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해낼 수 있다. 어떻게든 섹스를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남성연대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말이다. 자신들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섹스하고 싶으니까. 너도 섹스하고 싶으니까. 우리는 섹스하고 싶으니까. 우리는 남자니까 저 여자와 섹스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중 제일 먼저 저 여자와 섹스하는 사람 소원을 들어주자. 왜? 우리는 남자잖아!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성기를 긍정하는 방법을 배우는 삶이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성기에 애칭을 부여하는 여성들은 없거나 적다. 아직도 여성 성기 긍정하기의 일환으로 ‘여성 성기 그림 콘테스트’, ‘여성 성기 이름 콘테스트’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하지만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에 사랑스러운 자신만의 이름을 붙인다. 자신의 성기를 부드럽게 만지며 ‘똘똘이’ 혹은 ‘존슨’이라고 사랑스럽게 부를 수 있는 인간의 삶이란 어떨까. 성기를 만지는 방법을 배우고 성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며 성장 과정을 보낼 수 있는 인생이란 어떨까.
그러나 섹스와 성범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남성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남성이 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부러움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섹스와 성범죄의 경계를 모호하게 두는 것은 성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성범죄를 문제 삼는 이들에게 장난을 다큐로 받는다며 남성의 성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 많은 성범죄도 기꺼이 환영하겠다는 뜻과 무엇이 다른가. 왜 이놈의 남성연대는 더 많은 성범죄자들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가. 성범죄를 일탈 또는 장난으로 웃어넘기는 남자들은 자신들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한다며 짜증내기 전에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이라도 해줄 때 고마워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