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그라지라]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광주 트라우마 센터 계간지 그라지라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질수록 소위 말하는 유명세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유명세란 그야말로 곤욕이다. 다른 사람 이야기면 그런가보다 할 텐데 안타깝게도 남 일이 아니다. 책을 내고 방송 활동을 하면서 나는 일종의 ‘유명세’를 치르는 사람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유명세의 장점은 단점에 비해 매우 적다. 나와 관련된 기사에는 언제나 악플이 넘쳐난다. 덕분에 강의에 가면 이런 질문을 자주 듣는다.

“그 많은 공격을 어떻게 견디세요? 멘탈을 관리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걱정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질문이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오는 공격을 그대로 견디는 건 쉽지 않기에 해주시는 고마운 걱정이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만의 비법 같은 것을 전수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 무엇도 나를 망칠 수 없다고 쿨 하게 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잠깐 멋있게 보이자고 있지도 않은 허세를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향한 악플이나 공격을 멈추는 방법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고소를 하라고 하지만 고소를 해도 흘러오는 길 자체를 원천봉쇄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 괴롭히기가 인생의 유일한 낙인 사람들을 멈추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고 남는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할 지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욕할 거리를 찾아내 입과 손을 놀린다. 심심한 사람들은 심지어 집요하다. 그렇다고 내가 악플 마다 댓글을 달면서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해명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내가 그들을 찾아가 놀아줄 수는 없으니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인터넷 상에서 퍼지는 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그리고 악플은 악플을 부른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옛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뉴욕도 30초면 가능하다. ‘사이버 불링’이라는 사이버 상에서의 괴롭힘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고, 익명 기사에 등장한 인물의 ‘신상털이’도 누리꾼들의 활약만 있다면 순식간이다.

이러한 시대에서의 욕은 단순하지 않다. 그냥 욕을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욕이 될 만한 요소들을 최대한 응축해서 타인을 공격한다. 바꿔 말하면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로 총알을 만들어 사용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욕들 중에서도 유난히 빠르게 퍼져나가는 것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고, 대체로 그런 두려움이나 공포는 사회적 소수자 차별과 맞닿아있었다. 욕은 사용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과 혐오, 선입견이 만연한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글이 자주 올라오는 커뮤니티 ‘일베’에 ‘갤럭시 보지의 소유자 은하선’이라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찬찬히 읽어보니 은하선은 자위를 자주 한다니 분명 보지가 늘어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주만큼 늘어난 보지를 가졌을 거라 생각해 ‘갤럭시 보지’라는 칭호를 선사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는지 단계별로 따라 가보자.

첫 번째, 자위란 섹슈얼한 매력이 없어 같이 섹스를 할 상대를 찾지 못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혼자 방에 쭈그리고 앉아 남 몰래 하는 행위일 뿐이다.
두 번째, 섹스 대신 하는 자위란 삽입을 하지 않고는 성립이 되지 않으므로 뭐라도 삽입하여 자위를 할 것이다.
세 번째, 보지는 무언가를 삽입할수록 늘어나며 탄성이 떨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위를 많이 하면 보지가 늘어나버릴 것이다.
네 번째, 여성으로서 매력이 없는 은하선은 섹스 상대 찾기에 실패해 넘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자위를 많이 할 것이며 그로 인해 우주만큼 늘어난 ‘갤럭시 보지’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갤럭시 보지’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그들은 아마도 은하선에게 성적 모욕을 줄 생각에 신났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도 만나보자. ‘젠신병자’라는 욕이 있다.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며, 트랜스젠더와 정신병자를 혼합해서 만든 이중혐오적인 욕이다. 트랜스젠더를 욕으로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남성 혹은 여성 둘 중 하나로 보이지 않거나 자신이 트랜스젠더로 ‘오해’ 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할 것이다. 정신병자를 욕으로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신질환에 대한 혐오와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본인에게 찍히는 것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정신병자’라는 단어는 장애인비하적인 표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정신병자’를 ‘정신질환자’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둘을 혼합하여 욕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어떨까. 정신병자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자’라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효과’를 예상할 수나 있을까.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과 트랜스젠더를 전부 모욕할 수 있는 말을 욕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인은 ‘정신병자’도 아니고 ‘트랜스젠더’도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 안에서 가능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형과 언니라는 단어를 합성한 ‘형냐’라는 단어도 있다. 주로 형도 언니도 아닌 존재, 다시 말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를 모욕하기 위해서 쓰인다.
욕이 나를 잠식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익숙해지는 것과 전복시키는 것. 마음이 작아지면 몸의 움직임도 작아지기 마련이다. ‘갤럭시 보지’라는 욕이 나를 공격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난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 갤럭시처럼 넓고 반짝이는 보지를 가진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광활한 보지는 여신의 상징 아닌가. 온 세상 만물을 품을 수 있을 정도의 따뜻함과 반짝임은 내가 언제나 갈망하던 것이라고.
나는 이 글이 욕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마음가짐 정도로 축소되어 읽히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계에 떠다니는 욕이 나를 공격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방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는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욕에 노출되기 쉬운 이 세계와 싸워 나가야 한다. 왜 사회적 소수자는 모욕적인 말들을 ‘당연하게’ 들어야 할까. 왜 어떤 사람들은 존재조차 감추며 살아가야 할까.

‘눈치 게임’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앉아 있나. 꾸밈 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언제 누가 강요했냐고 말을 하고, 커밍아웃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개인의 용기 부족이 아니냐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아도 눈치 볼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세계에서 살이 찔까봐 눈치를 보고, 비정상으로 보일까봐 눈치를 보고,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눈치를 보고, 가벼워 보일까봐 눈치를 보고, 천박해 보일까봐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페미니스트가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시대다. 심심하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유행’이 되어버린 세상은 희망이 될까 아니면 절망이 될까. 자극이 전부인 세상에서 페미니즘은 자극이 될까 아니면 비극이 될까. 페미니즘은 타인의 삶을 타인의 입장에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며,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세상을 새롭게 느끼게 해준다. 다른 이의 삶을 섣불리 안다고 말하지 않는 것. ‘이해한다.’는 단순한 말로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 이게 바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의 시작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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