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경향신문] 그들이 미투를 부정하는 건 변화가 두렵기 때문일지도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이다. 소설가 하일지는 한 대학 강단에 서서 이것을 두고 “점순이가 남자애를 강간한 거야. 얘도 미투 해야겠네”라고 말했다. 뿌리 깊은 강간문화에 둘러싸여서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 채 입을 다물고 살던 여성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미투 운동은 고발을 넘어서 연대의 힘을 만들었고 그 에너지가 불러온 사회적 변화는 그야말로 혁명이다. 하일지는 ‘강간’과 전혀 관련 없는 장면을 불러와서 ‘강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희석했고, 미투 운동과 피해자들의 폭로를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구는 것 정도로 취급하며 조롱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2년 전에 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의혹과 다른 문제 발언들이 공개되면서 하일지는 자신이 일궈놓은 잡초밭을 피해가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하일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강단을 떠나겠단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거나 사과를 하지는 않겠다면서. 도리어 본인이 “자존심 깊이 상처를 입었고 학생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단다. 충격을 받은 걸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다가 하일지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게 되었을까. 아니 왜 언제 자신의 발등을 찍을지도 모르는 호랑이 새끼와 같은 학생들에게 믿음을 주어 자존심에도 깊이 상처를 입고 만 걸까. 어떻게 한다면 하일지가 강단을 떠나는 일 이전으로 모든 것을 돌릴 수 있을까. 그가 학생들을 향해 주었던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학생들이 입을 닫는 것이다. 학생들이 강의 중에 성폭력 피해자를 조롱하는 발언을 들어도 흘려보낼 수 있는 굳건함을 갖고, 여기서 입을 열어서 들추었다가는 본인이 매장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껴안은 채로 모든 것을 참고 견뎠다면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방법이 한 가지 더 있긴 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이 했던 언행을 전부 주워 담는 것. 그러나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면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결국 하일지가 말한 ‘신뢰’란 내가 어떠한 성적 모욕을 하더라도 학생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나를 태양과 같은 사랑으로 보듬어 주리라는 믿음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뢰의 근원은 사회가 그동안 묵인해온 ‘강간문화’다. 강간문화는 강간이 만연한 사회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말하는 포괄적인 단어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주변에서 문제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쉽게 탓하고 비웃으면서 살아왔다. 강간문화를 충분히 누린 것이다. 성폭력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봐 오랜 시간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탓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그런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과거에서 건너오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한 말을 굳이 콕 집어 문제적이라고 말하는 세상 때문에 실망했단다.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남은 인생을 보내도 될 줄 알았는데 계획이 무너진 사람들은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는 방법조차 깨닫지 못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아내 외에 어떤 여자와도 일대일로 술자리나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펜스룰’은 일종의 협박이다.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일로 자꾸 남자들을 성폭력 가해자 취급할 거면 애당초 여자들을 껴주지도 않겠다는 치졸한 마음이 한껏 묻어난다. 또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미투의 부작용으로 여자들이 연애하기 힘들어질 거라는 글들이 줄지어 올라오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눈길만 줘도 ‘시선강간’이니 뭐니 떠든다면 남자들은 더 이상 여성과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을 거고, 그렇게 된다면 다소곳이 앉아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려왔던 많은 여자들은 어디 가서 연애를 할 수 있겠냐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면 연애할 만한 ‘여자’를 고를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왔다는 것인가. 그동안 여자를 동료가 아닌 성적인 존재로 바라봤다고 고백하는 것인가. 내가 곧 세상의 중심이며 내가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으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존재는 도태될 것이라는 믿음,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건방진 사고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다.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가정폭력’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1980년대 후반이다. 그전까지는 ‘폭력’이 아닌 부부싸움이나 가정사 정도로 불렸다.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남편들의 폭력은 ‘사랑’으로 쉽게 포장되곤 했다. 말은 힘을 가지고 있다. ‘자꾸 이러면 여자들과 일하지도 연애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협박은 마치 ‘가정폭력’이라는 단어를 자꾸 사용해서 단순한 부부싸움을 범죄 취급하면 남자들이 무서워서 혼자 살지 누가 결혼을 하겠냐고 되묻는 것과 같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실망을 분노로 표출하는 이들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바뀌어버린 세상에선 본인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감 말이다.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면 이미 누구보다 페미니즘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 왜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세상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이 쉽게 폭주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기꺼이 들어간다면 사랑해주겠지만 그 틀을 벗어나 돌발 행동을 한다면 난도질하겠다는 메시지는 오랫동안 여성들을 인형으로만 존재하도록 만들어왔다. 좁은 틀을 주고 그 안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던 사회 속에서 많은 이들은 입을 닫고 고통을 당했다. 미투는 이 모든 것을 들추어내려는 외침이다. 가해자를 향한 법적인 처벌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맥락을 삭제하고 법적인 처벌 안에서의 유효성만을 이야기한다면, 놓치고 가야 할 부분이 많다. 오래되어서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사건이나 이미 가해자와 합의를 본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또 ‘모르겠으니 일단 법대로 하라’는 가해자의 말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리 경찰서를 가라, 한참 전 일을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진다고 들추어내는가,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은 미투 관련 기사 댓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성폭력은 특정한 괴물이 갑자기 골목에서 나타나서 일어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학교, 직장, 클럽, 화장실, 집 등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지인이나 상사, 선생님, 가족, 연인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특히 친족 성폭력이나 권력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은 피해 당시 바로 고소를 하거나 신고를 하기 어렵다. 맥락을 전혀 살피지 못하고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나누는 미투 감별사들과 차라리 이럴 거면 ‘남자끼리만 놀겠다’며 ‘펜스룰’을 외치는 이들이 과연 다른 존재일까.
성폭력 사건을 두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발언으로 핫이슈가 되었던 유시민은 조개를 하찮게 봤다. 여기서 해일은 당장 코앞에 닥친 대선, 조개는 성폭력을 뜻했다. 해일은 그야말로 몰려오지만 조개는 알아서 봉지 안에 기어들어가지 않는다. 그냥 두면 쫓아오지도 않을 조개를 해일이 몰려오는 해안가에서 줍고 있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성폭력은 해안가에 두고 오면 쫓아오지 않을 조개였으며 갯벌에 파묻어버리면 조용할 조개였다. 조개들의 말하기 대회인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2003년 처음 시작해 올해로 16회를 맞는다. 2018년의 지금, 조개들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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