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경향신문] 원조여성이란 누구인가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여성이라고 믿는다. 아마 앞으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내 입으로 직접 ‘나는 여성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일까. 뭘 보고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일까. 혹시 내가 신뢰 가는 얼굴을 가졌기 때문일까. 친분 있는 사이라면 그동안의 내 행태를 보고 믿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나와 전혀 친분이 없고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도 내가 여성임을 철석같이 믿는다. 심지어 내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지어냈다고 하시던 분들도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왜일까.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나를 여성이라고 인식할까. 외부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높은 확률로 먼저 나오는 대답은 ‘성기’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의 성기를 본 적이 있는가. 내 성기를 밝은 곳에서 자세하게 본 경험을 한 사람은 아주 한정적이다. 게다가 난 내 성기 사진을 공개한 적이 없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어떤 성기를 가졌는가에 따라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성별 중 하나로 지정당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기가 곧 성별을 증명한다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내 성기를 한번도 살펴본 적 없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성별은 성기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가수 연습생 한서희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트랜스젠더(MTF)는 여성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서 화제가 됐다. 한서희는 ‘고추가 있는데 어떻게 여성이냐’며 여성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한서희의 글이 올라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가 한서희를 비판하며 ‘자궁적출 수술을 하면 여자가 아닌가?’라는 요지의 질문을 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인 한서희를 공격한 것으로 비치는 바람에 결국 하리수는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리수는 사과문의 마지막 문장에 ‘여성인권에 앞장서는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각종 SNS에 하리수는 진짜 여자가 아니라는 누리꾼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 
하리수는 2001년 한 화장품 회사 광고를 통해 데뷔했다. 광고 속 하리수의 얼굴은 다른 남성의 목젖과 합성된 모습이었고 ‘여자보다 더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남성의 상징’인 목젖을 가지고 있는, 그러니까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부분이 부각됐다. 하리수는 한 인터뷰를 통해 방송을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데뷔 당시 각종 언론과 방송은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여자보다 더 예쁜’이라는 수식어로 그녀를 소개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방송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놀랐고, 많은 사람들이 하리수를 통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의 등장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진짜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남자였다가 여자가 된 거야? 진짜 여자도 아닌데 저렇게 예쁘단 말이야? 그럼 성기도 수술한 거야? 그동안 자신을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많은 이들이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하리수에게 섹슈얼한 매력을 느꼈고,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진짜 여자’가 아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여성이 아니었던, ‘원래 남자’였던 하리수를 ‘섹시하다’고 인지하게 되면 본인의 이성애자 남성 정체성이 훼손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하리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형’과 ‘언니’를 합성한 ‘형냐’라는 단어를 만들어 부르며 하리수의 여성성을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 남성 개그맨은 ‘사이비 냄비’ ‘인공보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하리수를 공공연히 성희롱하기도 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내 성기를 본 적이 없음에도 나를 당연하게 여성이라고 인식한다. 성기는 ‘생각보다’ 성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건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본 적도 없고 볼 일도 없는 타인의 성기를 가지고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현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하리수의 여성성에 반기를 들고 ‘원조 여성’ 운운하는 이들은 더 이상 ‘이성애자 남성’에 한정되어있지 않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진짜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의 삶과 경험을 가질 수 없으므로 ‘챙길 대상’이 아니라는 이들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삶과 시스젠더(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정체성'이 사회에서 지정받은 '지정성별'과 일치한다고 느끼는 사람) 여성들의 삶은 다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노력’으로 쟁취해야 하는 삶과 굳이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같은 시스젠더 여성들끼리라 할지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여성의 편을 들어주거나 다른 여성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떤 여성들은 살면서 성차별을 겪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여성들은 나도 여자지만 페미니스트는 너무 무섭다고 말할 것이며, 또 어떤 여성들은 성범죄는 여성이 야한 옷을 입어서 생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다. 이런 상황에서 자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면 ‘원조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원조 여자’가 살면서 겪은 성차별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 여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당신에게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애인을 여성이라 생각하고 연애관계를 지속했으며 주기적으로 성관계도 하고 있다. 당신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애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애인이 할 말이 있다며 분위기를 잡는다. “나 사실은 트랜스젠더야. 자기 만나기 몇 년 전에 성기 성형 수술도 받았어. 그동안 사실대로 말 못해서 미안해.” 당신이 만약 이 상황에서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면 그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사회적인 편견 때문일까. 애인의 성기가 수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일까. 애인에게 자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일까.

또 다른 상황도 떠올려보자. 이번에도 당신에게는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있다. 당신은 애인을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성관계도 하고 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인이다. 그런데 애인이 몇 년 전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당신은 애인과 계속 만날 것인가. 아니면 헤어질 것인가. 질문이 이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서로 사랑하는데 자궁의 유무가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에는 반대하지만 내가 사귀고 싶지 않다는 것은 내 개인 취향 아니냐고 묻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번쯤은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이 여성을 좋아하는 이성애자이지만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스젠더만 좋아한다면, 여기서 본인이 좋아한다고 믿었던 ‘여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사회적인 성차별의 근간을 흔들기 위해서는 ‘성기’만으로 사람을 여성과 남성 중 하나로 나누고 그 틀에 딱 맞아떨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를 ‘변태’라고 부르며 ‘정상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성기’ 모양새로 남성 혹은 여성 둘 중 하나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협소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지구인으로서 항상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트랜스젠더는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성별 이분법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존재다. 성기의 모양만으로 ‘원조 여성’ ‘원조 남성’을 가르고 배척하는 것이 과연 성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일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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