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경향신문] 페미니스트에게서 비운의 과거만 기대하는 당신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페미니스트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사정’보다는 ‘사건’에 가까운 일을 상상하곤 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 부모님이 매일같이 치고 박고 싸우는 집안에서 자랐다거나, 아빠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골프채를 휘두르는 탓에 집 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다거나, 부모 없이 자란 탓에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서 옆집 아저씨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거나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한 여자를 페미니스트로 성장시켰으리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파란만장한 사건 속에서 성장한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확률이 높을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뜻은 삶이 더 이상 멈춰 있도록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으니까. 그러나 나는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며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끈질기게 어쩌다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물으면서 저런 종류의 사건에 대한 고백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직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화를 차마 표출할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남성 혐오 속에 갇혀 살다가 안타깝게도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린 비운의 한 여성, 그게 바로 내가 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일부러 성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라는 사실을 감추기도 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람들의 넘쳐나는 동정과 호기심을 한 번 더 견디겠다는 의미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만졌느냐는 질문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자신이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은 사실 거기서 거기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만졌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왜 당시에 싫다고 말하지 못했느냐는 질문까지가 한 사이클이다.
질문에 답하기보다 더 힘든 건 동정받기다. 질문에는 답이라도 하면 되지만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나도 딸이 있어서 잘 아는데 내 딸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안된다. 너희 부모님은 정말 힘드시겠다, 부모님께 잘해 드려라’라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잡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를 위로하겠다는 것인지 내 부모님을 위로하겠다는 것인지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자신의 딸을 위로하겠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선의를 가지고 하는 모든 행동이 옳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 
나 자신이 바로 성폭력 생존자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방송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때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무조건 동정을 받는 것이었다.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섹스칼럼니스트이자 양성애자가 ‘되어버린’ 모든 과정을 성폭력 피해자라는 나의 정체성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매우 곤란한 일이다. 나에게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중요한 부분이지만 나를 이루는 정체성은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성폭력 피해자도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말 그대로 존재를 의심받기 시작했다. 의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성폭력 피해자가 저렇게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일을 얼굴 드러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렇게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왜 그 당시에 따지거나 싸우지 못했을까. 무슨 꿍꿍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성폭력 가해자가 조사 과정에서 나에 대해 했던 말과 일치한다. 저렇게 말 잘하는 애가 나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 성폭력 가해자의 주장이었다. 얼마 전 한 변호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방송에서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말할 때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줄 알았단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묻자 말도 잘하고 너무 밝고 긍정적으로 보여서 그런 일을 직접 겪었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와 만나왔던 변호사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두 번째, 한 명의 여자가 살면서 저렇게 많은 일을 당했을 리가 없다. 분명 지어냈을 것이다. 사실 그건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일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내 인생에서만 이렇게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도대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 않다. 백 번 양보해 내가 지어냈다고 치자.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는가. 분명 내가 겪은 일이고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겪은 일인데, 나를 양치기 취급해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성폭력 피해자가 합의금만 받아도 무조건 꽃뱀이라고 모는 세상에서 자신이 겪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서까지 자기 자신을 성폭력 피해자라고 말하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은 나에게 끈질기게 e메일을 보내 사건 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차라리 불쌍하고 재수 없는, 인생 기구한 여자 취급이라도 해줄 때가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성폭력 피해자는 입을 다물게 된다. 연대해주는 이들보다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고 느끼는 순간 성폭력 피해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입을 막는 것일까. 듣기를 거부하고 존재를 지워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애초에 의심은 무엇을 위한 의심이란 말인가. 
세 번째, 성폭력 피해자라기에 내가 충분히 예쁘지 않다. 이 문장은 이해가 잘 안되실지 모르니 설명을 덧붙이겠다. 성폭력이란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보기에 성폭력 피해자란 예뻐야 한다. 예쁘지 않은 여성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성폭력이란 성적 매력이 넘치는 예쁜 피해자가 밖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그들이 보기에 나는 성폭력을 당할 만큼 ‘섹시’하거나 ‘예쁘지’ 않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성폭력을 당할 만큼 예쁘지 않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예쁜’ 여성은 언제든지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예쁘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왜 누군가는 평가받고 성폭력을 당하는 존재가 되는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혹여나 사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검열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도록 만드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나는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성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다. 피해자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가두는 한 피해자는 납작한 평면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 틀에서 벗어난 나와 같은 성폭력 피해자는 없는 존재이자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더 안타까운 건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내려놓아도 나는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어려운 존재라는 점이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나란 존재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섞어놓은 멋진 글을 본 적이 있다. 
‘성폭력을 당한 은하선은 충격을 받고 남성 혐오주의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남성과 더 이상 섹스 혹은 연애를 할 수 없는 비운의 여성이 되는 바람에 여성과 만나고 섹스를 하는 레즈비언이 되었다. 레즈비언이 된 은하선은 예쁜 여성과 만나고 섹스를 하기 위해서 남성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더욱 극심한 남성 혐오주의자가 되었다.’
대충 이러한 흐름의 글이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고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내가 그다지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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