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경향신문] 여성에게 성을 탐할 틈을 허하라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강의 후 섹스토크를 하던 중 제주도에 있는 한 인적이 드문 오름에서 섹스를 해봤다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탁 트인 오름에서의 섹스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난 당장 그녀가 섹스했다는 그 오름으로 달려가서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치마 밑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을까. 울창한 나무가 나의 섹스를 응원하는 경쾌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 다른 도시에서 강의가 있었고, 난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성이 손을 들고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제주도 오름에서 섹스해봤어요.” 
얼굴도 본 적 없는 두 여성이 ‘제주도 오름에서 섹스’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제주도 오름에서 섹스를 해본 두 여성이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오름에서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으며 섹스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마음속 비밀로만 간직되었을지 모른다. 말하는 순간 비로소 역사가 되어 살아난다. 섹스토크를 진행할 때마다 여성들이 섹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다.
세상이 바뀌었고 무려 로봇 청소기가 바닥 청소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섹스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워한다. 섹스라는 단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여성은 그야말로 쉽게 다리 벌리는 여성 취급을 받는다. 섹스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편견 어린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이란 많지 않다. 섹스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선입견을 걱정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야말로 ‘권력’이다. 물론 권력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게 권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섹스란 파트너와의 ‘성관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기, 자위를 포함한 성과 관련된 모든 이슈를 말한다. 
섹스에 대해서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권력의 배분은 우리가 차마 그 권력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유아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터넷 서점에서 ‘고추’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수많은 어린이 도서가 나온다. 여기서 고추란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바로 그 고추다. 남성의 성기는 동화책의 제목이 된다. 그렇다면 ‘조개’는 어떨까. 혹시 모르니 조개도 한번 검색해보았다. 조개가 들어간 제목을 가진 여러 가지 도서를 검색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바로 그 조개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키워드가 잘못된 건 아닐까. 머리를 굴려 이번에는 ‘잠지’라는 단어로 검색해보았다. <할아버지 잠지>라는 시집이 한 권 나왔다. 이것도 아니다. ‘보지’라는 단어로 다시 검색해보니 <가보지 않은 길>,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책뿐이었다.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된 동화책은 결국 한 권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고추 달린 놈으로 불리면서 자랄 때 다른 누군가는 이름조차 없는 성기를 가지고 자란다는 건 분명 불공평하다. 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부를 만한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현실이다. 
얼마 전 <하는 여자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행사는 섹스를 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으자는 취지로 기획해 올해 2회를 맞았다. 마치 세상에 없는 듯이 취급받았던 ‘성기’ 드러내기의 중요성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작년에는 ‘성기’ 이름 콘테스트, ‘성기’ 모양 자수 브로치 만들기, 색칠하기 등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했고, 올해도 ‘성기’ 모양 비누 만들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비누 클레이로 본인이 원하는 모양의 ‘성기 비누’를 만드는 워크숍이었다. 비누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성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거나 상상해보게 된다. 여성들이 모여서 손으로 조물조물 뭔가를 만드는 평화로운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뿌듯한 기분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왜 애당초 여성의 성기는 없는 것처럼 취급받았나. 누군가의 성기는 마시면 벌떡벌떡 선다는 ‘벌떡주’라는 술의 디자인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큼지막하게 조각상으로 만들어 공원 이곳저곳에 전시하기도 하는데 왜 내 성기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을까. 누군가의 성기는 해학이 되는데 왜 내 성기는 해악이 되는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신체의 일부분이 웃음거리 취급받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라고. 그러나 그건 아예 없는 취급받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렇게 ‘성기’라는 신체의 일부분만 살펴봐도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이 얼마나 다르게 취급받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는데 여성이 받는 차별이 어디 있냐며 지금은 역차별 시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적어도 네 성기에는 ‘귀여운 이름’이라도 있지 않느냐고 화를 내도 못 알아듣는 이들에게 과연 밝은 미래가 있을까. 
나는 여성들이 만든 형형색색의 다양한 ‘성기 비누’를 보면서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혔다. 워크숍이 끝난 후 ‘말하는 여자’ 토크 콘서트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들이 각자의 경험에서 비롯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자리였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많은 참가자들이 “너무 좋았다”는 소감을 나눠주었다. 앞으로 이렇게 섹스에 대해서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나는 섹스토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자위 방법을 모르는 남성들은 매우 적지만, 자위 방법을 모르는 여성들은 생각보다 많다.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되는지 누가 하나하나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여성들, 클리토리스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는 여성들 앞에 성기 사진집을 펼쳐놓고 워크숍을 한 적도 있다. 물론 모든 여성이 자위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모든 여성이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분명 느리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고 여성들의 섹스도 점점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위도, 클리토리스도 모르는 여성들이 있다. 그 여성들이 너무 느린 걸까. 그렇다면 이 여성들을 세상의 변화에 뒤처진다며 나무랄 것인가. 아니다. 유아기 때 이미 빼앗겨버린 그 ‘권력’을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찾아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섹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더라도 색안경을 끼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바라봐줄 수 있는 공간 안에서 여성들은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 공간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자위 방법을 모르는 여성에게 이것이 자위 방법이라며 일괄적으로 가르쳐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위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하나씩 공유하는 자리다. 조금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섹스 판타지도 나눌 수 있겠다. 상상의 영역에까지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일단은 자유롭게 놓아두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겠다. 어떻게 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서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영역에서 다른 이의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이렇게도 해볼 수 있고 저렇게도 해볼 수 있으나 굳이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자리 안에서 많은 여성들은 편안함을 느끼며 변화할 수 있으리라. 여성들의 섹스토크가 필요한 이유다.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덧붙인다. 모든 여성이 섹스를 하거나 자위를 하거나 성기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섹스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힘을 되찾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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