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경향신문] 무엇이 그들의 ‘성욕’을 드러내게 했나

+경향신문 은하선의 섹스올로지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대전의 한 중학교에서 여성 교사 수업 중 열 명에 달하는 남학생들이 집단으로 성기를 드러내는 성범죄 사건이 벌어졌다. 해당 수업을 진행했던 여성 교사가 학교당국에 신고했고 이후 많은 언론들이 앞다퉈 이 사건을 다뤘다. 어떻게 학생이 감히 선생님 앞에서 자위를 할 수가 있느냐며 ‘교권 추락’을 본질적인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과 ‘우리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충격적인 일’이라는 증언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위’를 하는 ‘학생’이 충격적인 것인가, ‘선생님’ 앞에서 ‘자위’를 하는 ‘학생’이 충격적인 것인가. 
정말로 ‘교권 추락’이 문제라면 ‘학생’ 앞에서 ‘자위’를 하는 ‘선생님’은 어떠한가. 여성 교사가 아닌 남성 교사가 수업하던 중이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느냐는 질문에 교육당국이 남성 교사 수업 중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대답하는 순간, 성적 쾌락을 위한 자위행위가 아닌 음모 길이 등을 비교하던 단순한 장난이라고 대답하는 순간, 이 절망의 구렁텅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질문을 다시 해보겠다. 성기를 내놓는 행위로 상대방을 불쾌하고 두렵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성기를 내놓겠다고 결심하는 존재는, 어째서 언제나 남성인가.
학교에서 학생 혹은 교사가 성기를 드러내고 자위를 해서 문제가 된 사건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2013년에는 교사가 수업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학생에게 주먹을 휘두른 후 바지를 내리고 자위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자위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낸 것이다. 또 2016년에는 교사에게 훈계를 받은 학생이 갑자기 자위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분노 표출의 방법으로 자위를 선택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위’를 한 ‘교사’도 ‘학생’도 모두 남성이라는 것. 남성의 성기는 내놓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될 수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남성들은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이용할 수 있다. 반면에 여성들은 어떠한가. 그 어떤 여학생도 수업 중에 교사 앞에서 성기를 드러내고 자위를 하지 않으며, 그 어떤 여자 교사도 학생 앞에서 자위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남성들에게 언제든지 성기를 드러내도 괜찮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은하선의 섹스올로지]무엇이 그들의 ‘성욕’을 드러내게 했나
EBS의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에서는 얼마 전 ‘자위’에 대해 다뤘다. 잘못된 자위로 인한 위험성 등을 다룬 교육적인 방송이었다. 그러나 “매일 하는 정도”라는 나의 발언이 화제가 되면서 약 20회에 달하는 기사가 나갔고 결국 방송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권고 조치까지 받게 되었다. ‘교육적 측면이 없는 자위에 관한 과도한 언급이 문제’라는 것이 방통위의 공식 입장이었다. 모 위원은 방송을 보고 “이 방송이 EBS에서 나간 것이 맞는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방송에서 남성 패널들이 자위 방법 등을 언급하기도 했으나 그건 오히려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려 여성이 자위를 매일 한다고 방송에서 이야기한 것이 ‘충격적’이었나 보다. 방송 이후 ‘매일 자위 하는 여자인 나’는 어느새 남성들이 많이 모인 사이트에서 성기가 우주만큼 늘어나 버린 ‘갤럭시 성기’로 불리고 있었다. 식욕, 수면욕과 머리를 나란히 하는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성욕은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는 걸까. 
자위를 하는 여자는 음란한 여자가 되고 성기가 늘어나 버리지만, 자위를 하는 남자는 그냥 ‘남자’다. 남자의 자위는 성장 과정에 꼭 필요한 당연한 수순이며 성욕을 처리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만, 여성의 자위는 정반대다. 2000년대 초반에 개봉했던 <몽정기>라는 영화가 있었다. 남자 중학생들의 ‘황당하고 짜릿한 순간’인 몽정기를 묘사해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싱그럽고 아리따운’ 여자 교생 선생님의 등장 이후 남자 중학생들은 교생과의 섹스라는 공통의 꿈을 꾸고, 결국 교생과의 섹스에 먼저 성공하는 사람의 소원 들어주기 내기까지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수업을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봤자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단체로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섹스를 꿈꾼다는 사실을 만약 그녀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즐거운 소풍 날, 마시면 여자가 한방에 훅 간다는 음료를 제조해서 자신에게 먹이려 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을까. 교생 선생님이라면 이런 사춘기 소년들의 장난 따위는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패기 정도는 갖춰야 하나. 
이 영화가 남성 청소년들의 성욕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게 정말 ‘솔직한 현실’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해낼 수 있다. 어떻게든 섹스를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남성연대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말이다. 자신들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섹스하고 싶으니까. 너도 섹스하고 싶으니까. 우리는 섹스하고 싶으니까. 우리는 남자니까 저 여자와 섹스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중 제일 먼저 저 여자와 섹스하는 사람 소원을 들어주자. 왜? 우리는 남자잖아!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성기를 긍정하는 방법을 배우는 삶이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성기에 애칭을 부여하는 여성들은 없거나 적다. 아직도 여성 성기 긍정하기의 일환으로 ‘여성 성기 그림 콘테스트’, ‘여성 성기 이름 콘테스트’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하지만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에 사랑스러운 자신만의 이름을 붙인다. 자신의 성기를 부드럽게 만지며 ‘똘똘이’ 혹은 ‘존슨’이라고 사랑스럽게 부를 수 있는 인간의 삶이란 어떨까. 성기를 만지는 방법을 배우고 성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며 성장 과정을 보낼 수 있는 인생이란 어떨까.
그러나 섹스와 성범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남성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남성이 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부러움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섹스와 성범죄의 경계를 모호하게 두는 것은 성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성범죄를 문제 삼는 이들에게 장난을 다큐로 받는다며 남성의 성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 많은 성범죄도 기꺼이 환영하겠다는 뜻과 무엇이 다른가. 왜 이놈의 남성연대는 더 많은 성범죄자들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가. 성범죄를 일탈 또는 장난으로 웃어넘기는 남자들은 자신들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한다며 짜증내기 전에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이라도 해줄 때 고마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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